Interview With Lee Tae Sik

Lee Tae Sik (pseudonym) discusses his early life in Japan, his return to North Korea and military service in the North Korean military, before he defected to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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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Tae Sik was born in 1952 in a Korean community in Yamaguchi Province. His parents are both from Gyeongju in South Korea. They moved to Japan after their marriage. Although his father was the eldest son, he volunteered to work in Japan to make money. As a result, he worked in a coal mine in Kyushu and was well paid. He wanted to go back to his hometown right after the liberation but received a letter from his brother, who lived there, telling him “Do not come.” This made him hesitate to return to his hometown. Lee was born in the middle of this.  His parents owned a yakiniku restaurant. Most of the customers were Koreans, primarily sailors. Life was good.

    Lee’s father had no background in politics. He had learnt about it but never had a passion for communism. However, he supported the Chongryon due to the influence of the people around him. Although keen to return to South Korea, South Korea was very poor at that time, and there was a great deal of political and economic uncertainty. I's mother persuaded her husband to return to North Korea, and Lee’s father came to believe that within two years, North Korea would take the lead and unify the Korean Peninsula. Their other children also followed their parents' wishes without any objection. Although I's brother studied at a high school in Kyushu, he never questioned the decision, thinking that it was just the way things were. Lee boarded a ship and headed for Niigata by train, leaving all his luggage to "Paradise" and carrying only one bag.

    When he arrived, he was welcomed with paper flowers by people who looked like university students. But, nevertheless, as a child, he felt that they actually didn't want to come. He was placed in Pyongan Province. It was a village with 25 returnee households, and over 100 returnees, near Pyongyang. Everyone he met in the village seemed to be a “dirty beggar." Each house was shared between two families, but they were given two rooms since his family was large. When he walked into the house, the smell of raw beans was so strong that he still remembers it today. Although Lee returned to North Korea in his second year of primary school, he went back to the first year of the Civil School to learn Korean again. After living in North Korea for 20 to 30 years, he was utterly transformed into a North Korean and forgot Japanese. He was chastised for drawing Kim Il Sung's picture in the textbook at school. There was a large-scale "returnees hunt" in 1972. 

    Later, Lee joined the army, thinking "I must stay strong to survive." He was the only one in his family to enlist in the military, as returnees were not allowed to join before the Kim Jong-il regime. Military life turned out to be a meaningful experience for him.  In the military, you had to defend yourself, whereas, at home, you were following your parents' orders. He even endured the cold border conditions. Learning how to read a map helped him later when he escaped from the North. During his stay in Ganghwa Island, he felt that the South was developing. 

    Upon leaving the military, he decided to become a doctor and spent two years training at a dental clinic before medical school. He aimed to build a career as a doctor. However, in the 1990s, the "Arduous March" began, and everyone's life became concentrated on "eating." Some women even asked him to buy their bodies. It was a terrible experience.

    Lee had always dreamt of defecting from North Korea since he came back to North Korea, and it was his friend's attempt and the corruption in the society that made him defect.  One day, he told his parents about the defection plan, and his mother said, "Go to Japan. Get freedom." In 2006 autumn, he finally decided to defect but spent two years and six months in a prison camp in Myanmar, where he was treated like a slave. However, his military training was put to good use. After that, he was allowed to go to South Korea and now lives in Seoul. Now, he is delighted that he is safe and can freely express his thoughts. Still, he always regrets that he could not return to Japan.

  • F: Interviewer

  • M: 이태식 Lee Tae Sik 李泰植

F:이제까지도 선생님께서 많은 곳에서 증언,인생이야기를 해오셨겠죠. 선생님. 저는 어떻게 보면 귀국자 분, 탈북을 하신 그런 부분도 중요한데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태어나셔서 이제까지의 인생, 선생님의 고유의 인생, 그런 부분을 잘 좀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선생님께 유일한 소중한 인생이시잖아요. 젊은이가 무슨 이야기를… 부끄럽기는 한데요. 네, 잘 부탁 드립니다.

M: 나는 52년도에 일본 야마구치켕 시모노세키에서 태어났고,

F: 52년 몇 월?

M: 52년

F: 몇 월 며칠 이세요 선생님? 태어나 신게

M: 7월

F: 7월

M: 7월달에.

F:네 7월 달. 네 알겠습니다.

M: 그 때만 해도 정확한 거는 뭐 날짜야 뭐. 7월달 태어나서 음, 거기서 조선 초중고 학교 下関조선 초,중급 학교 그때가 조선 초중급 학교라고 되어있었는데, 그때 내가 1학년부터 2학년,올라가, 2학년 진급 할 때까지 거기 다녔거든. 근데 그게 일본 下関가 56년도인가 조선학교가 생겼다고 그러더라. 근데 그때는 우리가 大坪조라고 했는데 下関가 그 원래 이 조선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게 지금 神田町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 때는 大坪로 되어 있었는데 똥골 동네라고 해가지고, 조선 사람들 많이 살았어 거기가.

F:떵골동네..?

M:똥골동네 이제 완전 시궁창 같은 데가 많아. 시궁창 많고 그 위에다 돼지 키우고 그 위에 막걸리. 답배기. 만들어 팔고

F:どぶろく?

M:어어어, どぶろく 그 다음에는 담배 말아 팔고 우리 어머니가 그걸 잘 하셨어 그 원래 그때 당시에는 다 그랬던 모양이야 그 815, 45년도 한 3년을 그렇게 고생했다고 일본에서. 그래서 한국에 가겠다 귀국 하겠다 해가지고, 그 下関갔거든.

F: 아 그래서 원래는 부모님께서 다는데 계셨어요? 그쪽 계속 계시다  시모노세키쪽으로 가신 거에요?

M: 아니 大坪가 下関니까. 원래 九州에 탄광에 갔다고 했어. 근데 九州하고 下関가 가깝잖아. 그게 그래서 大坪에 왔다가 大坪에서 下関 Y마치 쪽으로 이사 왔지. 이사 와서 한국에 귀국하겠다고 해서 갔는데는, 우리 경주가 아버지,어머니 고향이니까.

F: 아 두분 다 경주세요? 그럼 같이 오셨겠네요. 일본에 함께 오신 거세요? 아님 일본에서 결혼을 하신 거세요?

M: 아니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우리 아버지가 장남이거든. 근데 돈 벌러 가겠다고 해서. 근데 여기 사람들이 다 뭘로 그리로 갔다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게 아니고 돈 벌러 갔어요 자기가. 근데 지금도 우리 고모 만나서 말하게 되면 우리 아버지가 맏이니까 그렇게 잘해줬대. 밥도 다 맏이라고 해서 그 옛날 사람이 다 그러잖아. 그랬는데 하루는 자전거 타고 올라가 내려가 올라가 내려가 하더니 때가 좋아서 일본에 가서 돈 벌어 오겠다고. 그게 아마 한 30몇년, 38년 그렇게 되겠지? 근데 우리 아버지가 먼저 가고, 그 다음에 우리 어머니가 따라갔지. 결혼식을 하고. 바로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갔어요. 가서 거기서 어쨌든 일본에 조금 정착해서 상황이 된 다음에 가겠다 해가지고 집에 편지도 하고 뭐 이렇게 했는데, 우리 삼촌이… 내 그 편지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어 북한에 있을 때 마지막까지. “형님 고향이 별개 있나요. 잘 먹고 잘 살면 고향이지 오지 않는게 좋겠다” 그런 편지가 왔어, 굿 바이 하고. 그 편지 내가 계속 봤어. 북한에 있을 때. 오지 말라 하니까 그때 당시는 일본이 그렇게 살기 힘들다 해도 한국 보다는 낫다는 말이라고. 한국은 그때 당시만 해도 얼마나 전쟁이 일어나고 막 휘말리고 그러면서 한국이 진짜 먹기 힘들었데, 그때는. 그래서 살기 전 오지말라해서 오지 말라 해서 안 갔어 안가고.

그 사이에 나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에 52년도 그 다음다음 해, 내가 그때 태어났지. 그것은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거든, 그때 우리 삼촌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길래 그걸 계속 봤거든. 우리 아버지는 항상 옛말 삼아서 말하는게, 九州에 일하러 갔어도 우리 그렇게 밥도 조금만 주고 그렇지 않았데. 뷔페식 그때 전기밥솥 해가지고 마음대로 퍼먹게 밥만은 배부르게 먹었데. 마음대로 먹으라고. 반찬이야 타쿠왕 같은 거 밖에 없겠지만 밥만은 많이 먹었데, 굶지는 않았데. 그 힘든 일 시키면서 그렇게 안 하는 데는 여기서 지금 나은거 보면, 착취가 굉장했다고 어쩠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때 당시 우리 아버지 말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요. 착취라는 것도 크게 보면 착취이지,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 같아. 어쨌든 우리 아버지는 그런 말 많이 해 우리 집이 구렁이가 많다는 거, 보리밥도 보리가 많다더라, 보리밥 뭐 이런 거 해서 어렸을 때 말을 많이 하던데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 내가 태어나서, 어릴 때 주로 생활이라는게 그저 그렇게 살았겠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식당을 했거든. 그 때 당시. 焼肉 했어요. 우리 집에서 한 50미터 80미터 안돼, 한 60미터 그 거리면 바다 그 위, 관부(関釜)연락선. 연락선이 다녔는데 부두가 딱 앞에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 식당이 참 좋았지. 목이 참 좋았어요.돈을 좀 많이 벌었어. 한국에도 보내주고 집도 조그만 집 몇 가지 그래도 한 몇 집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F: 야키니쿠 집 모습이나 그런 거는 아직도 기억이 남으세요 선생님?

M: 남지.

F: 손님들은 역시 조선인이나 한국인 그런 사람들 이었어요? 아님 일본인?

M: 우리 Y마치, 우리 식당 있는 데가 조선사람이 별반 없었어.

F: 그럼 일본인 대상으로 장사하신 건가요?

M: 배 꾼. 그 앞에 배타고 오는 사람들 많잖아. 그 사람들 한번씩 와가지고 먹는 다 하게 되면 탈탈 털어 마지막 까지. 밤새 노래 부르고 그 사람들이 많이 왔어.

F: 그런 속에서 태어나셨군요. 선생님

M: 태어나서 어릴 때는 고철 장사도 했는데, 고철 장사 하면서 난 뭐 어릴 때니까 도와주지도 못하고 동생 손목 잡으면서 매일 こづかい를 10원, 10엔 받게 되면 사탕 10알 정도 했어요. 둘이 손 붙잡고 걸어가서 ごめんください 하면서 사람 많이 없을 때. 이렇게 해서 간식을 계속 매일 먹던 생각도 나고. 그런 생각도 나요.

F: 주로 누구랑 같이 놀았어요? 기억 하세요? 동네 친구에요 아니면 형제 분?

M: 5형제 인데 5남매지? 근데 나는 남자로서 막내이고 우리 동생도 여자로서 막내이고 내 위 3명이 있었지 누나 하나 있고 우리 맏형 하고 둘째 형. 그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앞에 나가서 바다에 나가서 花火. 그때 해비 이런거 많이 팔았어요. へび 花火 뺑뺑 도는 거, 그런 것도 있었고 ゆかた 입고 나가서 가을 저녁에 거기서 얼마나 기분이 좋아. 그 다음에 ところてん 파는거 알아? リアカー 끌고 다니면서 저녁에 있지? 이렇게 놓고,

F: 쉬원하게

M:쪽 하고 여런, 뭐야 チャーハン 같은 거 그 생각도 나요

F: 黒みつ같은 거 묻혀 가지고.

M: 그 때 놀던 추억이 있다 .그렇게 해서 학교는 거기 조선학교 다니고,다니고,

F: 조선 학교는 멀었어요? 통학 길이. 아님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M: 멀었지. 그때 우리가 학생 10원, 10円를 가지고 버스를 탔거든. 하루에 20원씩 주지 근데 우리 작은 형 하고 같이 다닐 때는 40원이지. 그래서 갔다 왔다 하는 데는 어린이들, 미취약 어린이들은 돈을 안내고 탄대 부모가 대리고 다닐 때거든 혼자서 다니는게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어떨 때는 어릴 때는 우리 2째 형이 내 가방이랑 다 매고 내가 다른 사람 아주머니 탈 때 따라 들어가가지고 뒷자리 타서 10원이 남잔아, 그 10원가지고 큰 빵을 사 먹었어 우리 2째 형하고

F: 똑딱하셨네요 그때부터.

M: 우리 2째 형이 그런 거 잘했어요.그런 생각, 여러가지 생각 나요.

F: 형이랑 같이 학교 다니셨군요. 형은 몇 년 차이세요? 나이가?

M: 3년 차이. 내가 9살때 형이 12살된. 그 다음에 어릴 때 일본에서 어릴 때 잘 하지. 大丸 있잖아, 大丸에 가서 우리 누나 친구들이 나을 잘 대리고 다녔어. 大丸에 가서 그때 팽이멋있는 것 있었는데 그 때 어린 나이니까 한 6살때쯤 아주 어릴 때. 가니까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거 알아도 그때는 어릴 때니까 가지고 싶을 거 아니야, 하니까, 그냥 가졌어요 어떻게 내가. 보다가 가졌단 말이야 내가.가졌는데 그때는 cctv뭐 이런 거 없었으니까 그 안에서 다니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 사람에게 잡혔어요. 근데 어릴 때니까, 그러니까 우리 누나랑, 우리 누나 10살 차이니까 동생들 데리고 가서 그 다음에 다 조사 하더라고 . 거기서 朝鮮人이라고 하면서 욕을 하더라고.

F: 뭐, 어린이한테도 신분확인 그런걸 했었어요? 했겠죠.

M: 그래

F: 그럼 선생님 이름은 어떻게?

M: 이름만 들어도 朝鮮人인지 알잖아.

F: 선생님 이름은 通名, 안 쓰셨어요? 일본 이름은 안쓰셨어요?

M: 어. 안 썼어.아, 일본 이름 안 써도 이름 자체가, 나는 그때 우리가 원래 ○キモト라 했는데,○キモト라고 했는데 ソウジョウ라고 했거든. ソウジョウ 이름이 일본에 있나?

F: 자주 안 듣죠

M:ソウジョウ이렇게 읽은거지. 이름만 들어도 알겠지 뭐. 그건 어릴 때, 상당히 어릴 때, 하니까. 돈을 주고 사야한다는 것도 몰을 때.

F: 그래도 선생님 잘 생생히 기억하시는 거 보니까 겁이 좀 있으셨겠네요. 무서웠겠다, 그죠. 충격으로 남아 계시겠네요.

M: 겁이 낫지. 이게 나쁜 거다 좋은 거다 이렇게 알았으니까. 어쨌든. 그 때 大丸가 멋있었어요. 大丸 가게 되면 6층인가 그렇게 되는데 제일 위에가 놀이터가 있었거든. 비행기 같은거. 돈을 넣으면 위이잉 돌기 시작해서 와, 하게 되면 그 때 까지, 아파트 위까지 그렇게 쭉 그렇게 있잖아. 그 다음에 동전을 넣게 되면 만화 같은 게 나오는게 있었어. 지금은 없지 그게.

F: 좀좀. 네 백화점 위에 놀이터는 많이 사라진 걸로 알고 있어요.

M: 동전을 넣게 되면 만화가 쫙 나오거든, 그런 것도 보고. 그 다음에, 아, 그런 것도. 紙芝居 이런 자전거 뒤에 다라 만화 같은 거 태우고 다니면서 애들 잘 모이잖아? 지금도 그런 거 있나?

F: 紙芝居요? 사라진 문화 이기는 한데 그래도 그런 걸 하는 곳이 있어요. 紙芝居師는 있어요. 紙芝居하는 장사꾼?

M: 紙芝居 있어. 九州에 가서 봤어. ○○公園인가? 거기 가서 봤어 내가. 한 6년 전인가 갔었는데 紙芝居 있더라 거기서,

F: 저도 어렸을 때는 즐겁게 본 걸 기억해요

M: 근데 일본에 사는 사람은 보지 못해도 구경하러. 내가 봤어요 그거. 한 7년 전인가 가서 봤어. 판때기 안에 이렇게 2개, 하나 주고 땅 주면 더 주는 거(当て物) 그런 거 있었지? 그 다음에 엿도 하얗게 그런 것도. 어릴 때는 그런 게 더 재미이고 뭐 그런 생각도 나고. 근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나냐면, 북한에 가니까 간식이 없어요. 애들이란 게 간식이 많아야 배가 부르고 그런데, 애 때는 다른 재미가 있나 먹는 재미, 구경도 잘 못하니까 어쨌든, 북한에 가니까 먹을게 하나도 없어 간식이란 게 없어 사탕 과자 빵 카스테라 이런 거 하나도 업고 우유도 없고, 아이스크림 이것도 없고 みかん 주스, 그런 것도 한번도 없어. 진짜 한번도 처음에 가니까 한번도 없고. 그 다음에 비옷도 없어 우산도 없더라고. 그런 속에서 사니까 지나온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 지나온 생각 많이 하도 자꾸 그런 생각 하니까 사진 보면서 이건 몇 살 때 이건 몇 살 때 기억이 나니까. 내가 언제 말했는데 기억이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 기명, 저장, 회상 기억이란 이런 것이라 하더라고. 기명 딱 보고, 저장, 머리에 저장하고 다시 회상하고, 이게 순환이 돼서 영원한 기억이 된다. 그게 맞다는 건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야.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하도 일본에서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떠나서 북한에서 하도 못 살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자구 회상을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런 게 남아있지 않는가.이렇게 말하고 싶고.

F: 주로 어떨 때 생각 나셨어요? 나중에 시간지나가고 어떨 때 생각이 이런 거 있을 때 마다,

M: 어떨 때 가 없어요. 항상 내가 46년을 살았는데 46년 한치도 잊지 못했다니까. 한시도. 무엇 하나 좋은 게 없더라니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것도 그래. 집도 그래. 나가서는 조직 생활 하래, 비판하래, 뭐 하래, 자유는 없어 어디 가고 싶어도 못 가게 해 말하고 싶어도 말 못하게 해, 말하면 잡아가. 뭐가 좋은 게 뭐가 있어. 조총련 사람들 말이야,뭐가 하나라도 좋은 게 있어서 따르는가 이거야. 뭐 하나라도 좋은 거 있으면 말해 말해달라는거야. 나는 사람이 적어도 인권이란 것도 자유에서 나오잖아. 자유. 자유라는 것은 여만큼도 없더라니까. 마지막 까지 뭐가, 나보고 어떤 때 그런 생각이 나냐고 했지? 어떨 때가 없어 항상. 내가 그랬어. 내가 그때부터 계속 탈북 해야한다, 가야한다 이런 생각이 차곡차곡 쌓였지.

F: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렇구나. 형재들 다 같이 건너 가신 거였나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긴 했네요. 같이 大丸갔다가 뭐, 누나, 형, 동생들이랑. I선생님은 어떤 어린이 였어요? 활발했어요? 아니면 조금 낮 가림이 있거나 관심이 믾거나. 지금 말씀 들어보니까 팽이 보고 가지고 싶다거나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M: 나는 그런 것 보다는 어릴 때는 다 그렇겠지만 다는 안 그렇겠지. 거의 다 그렇겠지만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애였지. 참았고. 그때는 더 그랬지 하라면 이게 법이구나 하라면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어릴 때는 그랬어요. 하고 싶을 때도 이거같이 뱅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가장 이릴 때고. 점점 크면서는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해야 한다. 나는 항상, 부모들 말이 맡다는, 나는 항상 훌륭한 사람이 되야 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F: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M: 아, 그러겠지.

F: 훌륭한 사람이 되라?

M: 그거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게 너무나도 방향성 없이 방대한 것인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어쨌든 훌륭한 사람 만인이 다 인정해주는 사람으로 받아 들였고, 일본에 있을 때는 내가 조선학교에서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조선학교 입학 사진을 가지고 있거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더라. 부산에도 있고, 있다는데 만나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지금 못 만나고 있어.

F:조선학교는 그러면 많이, 오랫동안 안 가셨겠지만 학생들은 많았겠죠? 그때 당시에는.

M: 내가 보니까 입학 사진에 44명 있더라고. 입학사진에. 그동안에 나왔다 들어갔다 한 학생도 있겠지만 44명 중에 4명은 만나 봤어. 북한에서. 4명이 친구, 우리 동창이 있었고든. 1명, 2명은 만나보고 2명은 소식을 알고 있었고. 근데 야, 잘 된 사람 하나도 없어. 그래서 네, 이번에 올리면서 下関학교에 다닌 사람 있더라고. 근데 일본에는 조선학교 다닌 것만 해도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가까운 사이로 그렇게 알고 있더라. 근데, 그것 역시 일본이라는 이국에서 산다는 그런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이국에서 같은 학교 다녔다는 그런 게 있어서 그렇겠지만, 근데 그런 사람, 그렇게 했겠지만 나도 아는 사람 일본에서 찾아가서 만나 봤어요. 근데 상당히 냉정하고 좋지 않더라. 내가 그리워 하던 만큼 그리워 안 하고 반가워 안하더라. 아마 그건 아마도 리나상도 친구가 만약 탈북 해서 만나보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반가울 것 같아?

F: 만약에 저는 음.. 모르겠어요. 저는 반가울 것 같은데, 글쎄요.. 그 시대에서 만약 친구들을, 북을 가는 친구들을 보거나 그랬다면…음…

M: 근데 내가 왜 그런가를 생각 했거든. 이쪽에 아는 사람은 横浜에 있었던 사람이야 지금 横浜에 있더라고 찾아가 봤는데 하도 북한이라는 이미지가 나쁘잖아. 일본에서는 북한에 귀국한 사람하고 사돈도 안 맺는다고 하더라고. 계속 보내달라고 하고 그런 사람하고 사돈 맺게 되면 집안이 망한데.

F: 그런 얘기도 있구나?

M: 그런 거는 잘 알 텐데 거기 있으면서. 모르나 리나상은? 사돈도 맺기가 꺼려한다, 두려워 한다 그만큼 북한에 간 사람들에게는 부모, 형제를 도와줘야 하는게 사실이고, 도와줘도 도와줘도 끝이 없이 도와줘야 하는게 귀국자들 아니야. 북한에 간 사람들. 하니까. 그게 한번,두번,무한이라는 게 없잔니. 그러니까 막 諦めがきて、 막 이제는 승불이 난다, 이제는 싫다는 거지. 그런 걸 수십년 이 지나니까 내가 이번에 그때 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좋아 안한단 말이야. 또 한국에 고모하고, 사촌 형들이 다 있어요. 그 사람들도 좋아 안해. 우리 고모가 뭐라 하냐면 빨갱이 따라 갔다고. 우리 사촌 형 뭐라고 그러냐면 우리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많이 장애를 받았데, 군대 나가서도 좋은데도 못 가고. 그때 그 감정이 지금은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새록새록 생각나는 모양이지. 사람,인간이니까 하고 참고 마는데. 그런 것 도 있더라.

하, 그래서 내 생각은 그래. 지금도 일본에 재일동포들도 있잖아? 아마 그 사람 남아가지고 계속 우리들한테 보내주고 이렇게 하다가도 이제는 한이 돼서 원한으로 변한다고 할까? 그렇게 된 사람들 많은데, 그거지. 만약에 저 사람들이 귀국했더라면 너가 귀국했더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난단 말이야. 거기에 재일 동포 속에서도 이와 같이 귀국자와 남아있는 사람들 차이가 굉장히 차이 났지. 그 차이가 ‘귀국’이라는 불행 때문에 나온 거야. 나도 귀국 안했으면 자 사람들 저렇게 찬 대접 받고 안해도 돼. 너보다 더 잘 될 수가 있었어. 이렇게 생각 한다고. 그러니까 귀국이라는 게 얼마나 불행을 가져다 준 건가. 그래서 그 학교 다닐 때 우리 동창들 44명 동창들 있었는데 그 중에서 귀국한 사람과 귀국하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는 굉장히 차이가 날 거야. 의식의 차이도 그렇고 취향 차이도 그렇고 생활 차이, 모든 게 다 차이가 나겠지. 근데 그만큼 요만큼 차이에서 지금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 나거든 근데 이 차이가 ‘귀국’이에요. 원점이 귀국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니까 귀국이 얼마나 불행을 가져다 준거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야 맞는 말인 것 같아. 내가 横浜 있는 누구 만나고 누구 만나고 했는데, 푸대접을 받았다. 한국에 있는 사촌 형, 고모 만났는데 역을 먹고 부대접을 받았다. 이게 귀국이란 것에서부터 다 시작했다 이거지. 어쨌든 북한이라는 게 일본보다 더 잘 살고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다면 그런 푸대접도 안받아요. 그렇지 않아? 모든 게 다 귀국부터, 모든 게 다 내 인생은 귀국자들의 인생은, 불행은 귀국으로부터 시작 됐다. 원점이 귀국이에요. 근데 그래서 귀국 당시의 상황을 많이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정확하게 밝힐 건 밝히고 그래야 하지 되지 않는가. 북송의 피해자,

F: 네. 기록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건 운동이 아니었고, 인도적인 차원이 아니었어, 이런 거를 제대로 밝혀야만 할 거 같아요.

M: 근데 그때 당시 나도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우리 봤지만, 그때 우리 조선 시보라고 해서 뉴스도 들여오고 그때 막 평양 건설 하는거, 그 때 영화도 봤단 말이야 일본에서. 조선학교에 가져와서 보고 화보도 들여오고. 근데 특징이 사회주의,공산주의자 특징이 선전이에요. 그거 다 선전 하니까 일본에 살던 우리 아버지 이런 사람들 일본에서의 진실, 미디어의 진실이라는 게 있잖아. 신문,방송에서 진실성이 있잖아. 다 그런 건 줄 알았지. 아 이건 진짜구나 또 조총련도 얼마나 선전을 했어 우리 집에 매일 온 게 조총련에서 매일 와서 (북으로)가라, 가라 하고. 근데 거기서 가지 말라고 하면서. 가지말라고 오는 사람이 1명 밖에 없었어요.

F: 1명은 있었어요? 그래도?

M: 아니. 하루에 가지 말라 하면서 오는 사람 한명이라면 빨리 귀국하라 하면서 오는 사람이 10명 ,그런 정도로 많았다는 거지. 근데 가지 말라는 사람들은 있었어 그래도. 그 절대 거짓말이다 전쟁이 52년도에 완전히 ぺっちゃんこになって경제라는 거 하지 못할 건데 어떻게 그건 꼭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근데 갔다 왔는데 참 좋더라 진짜다 이거는 이렇게 말이야. 그 누구야 寺尾五郎가 있다고 공산당, 갔다 와서 좋았다하고. 조선은 3년 있으면 일본을 따라 잡는다. 그럴게 강연도 하고 책도 내잖아. 일본에서도 자꾸 내보내려고 했고, 모든 게 다 방향이 쏠리게 만들었어요.

근데 내가 아는 사람도 그때 어쨌든 북한에 귀국한 사람의 동기는 여러가지야. 늙은 사람들은 대체로 많이 안 왔어요. 그렇지. 늙은 사람은 많이 안 오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하니가 내가 조선에 가서 학교에 가서 무료 교육이라는데, 국제관계 대학 나가서 거기에 가서 세계적으로 무역 계통에 이름 날리겠다. 우리 매부의 매부가 그렇게 해서 갔데. 와세다 대학 졸업생인데 그렇게 해서 무역관계, 국제외교 쪽에 이바지 하고 싶다 해서 그래서 갔었거든. 그러다 완전 망했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 김○○이라고 그 사람도 있었고 아주 마르크스에 완전에 물 젖어서 러시아, 소련 가서 대학 졸업해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 하겠다고 왔다가 결국 그런 사람들 잡혀가고 다 그렇게 됐어 추방 됐다가 다시 오고. 공부하겠다 뭐 이런 게 많았고, 그 다음에 어떤 사람들 자기 자녀가 강도 짓하고 도둑질 하게 된, 그런 사람들은 조선에 가서 지상 낙원에 가서 사람이 되라, 그래서 보낸 사람. 또 어떤 사람은 도슨 알지? 이런 사람들 널리고 많이 봤으니까 너는 학교도 못 가고 놀림 받고 하니까 누구나 평등하게 잘 사는 지상낙원 조선에 가서 거기서 대접받고 살아라 하고 보낸 사람 있고. 이거 하나만 불려 해도 굉장한 하나의 논문이 될 거야.

9만 3천 340백명의 북송자들이 개개인 다 어떻게 갔는가 이거에 따지게 되면 굉장하지 않겠나? 방대한 거야 이것도.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 때 당시는 가지 않으면 안되게끔 모든 게 조성 됬어요. 그때 세계적으로 60년대가 세계 공산주의, 사회주의 지향하는 나라가 한 2/5쯤 됐었나? 그렇게 막 불어나다가 점점 망했지만은 그때 당시에는 사회주의 라는 게 온 세계의 지금 무슨 점염병같이 터질 때야 지금 코로나 처럼 있지. 사회주의가 막 퍼질 때야. 그 속에서도 2년쯤 있다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거든? 2년쯤 있다가 뭐 보내달라, 보내달라 하는 건 편지 갔어요. 여기 살기 나쁘고 오지 말라는 건 절대로 안가고 다 검열 . K상 말에 자기 형의 자기 온 집안 식구 귀국시키면서 안 그래도 형이 말하는게 절대 의문스럽다 하니까 동생에게 너 가서 만약에 좋으면 우표 뒤에 써서 보내라 해서 보낸 거 있지. 그거 보지 않았나?

F: 직접 보지는 않고 들어 봤어요.

M: 나 그 우표도 있어. 여기는 마을에서부터 자유롭게 나가지 못합니다. 먹을 것도 없다 해서 형님 오지 마세요. 누구누구 삼촌도 오지 말라 하라고 그러나 어머님은 보고 싶어 한다. 이런 식으로. 그 다음에 아예 싹 안 왔다. 근데 그런 말이 하나,둘 퍼지기 시작 했거든 62년도부터 그렇지 않으면 많이 갔지. 지금 인원들 동향을 보게 되면 62년도 까지가 한 80%인가 갔어요 80%가 2년에 다 갔거든 속아서 갔다는 게, 알기 시작해서부터 안 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거는 속아서 갔다는 걸 의미하지. 다 잘 살았으면 다 갔었지 그 사람들도. 근데 이런걸 정확하게..나는 그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다, 중요하다 그러나 알려줘야 된다. 이거야.

F: 알리고 저는 아직도 남아 계시는 귀국자 분들도 그렇고 일본이나 한국에 선생님처럼 계시는 분들의 생활 이런 것도 잘 봐야 된다고 보거든요. 나중에 이 얘기를 말씀 드릴 수 있으면 하는데, 지금 살아 계시는 분들에 대한 지원도 생각 해야하고 밝혀야하는 부분도 있고 할 일이 많다고 봐요.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M: 밎아 가만히 있으면 안돼. 지금은 이케다 후미코라는 분이 북송 일본 자유왕래 운동 본부라고 해서 그거 했지? 근데 지금은 안 해요. 근데 나는 어떻게 생각 하냐면 아직 그 사람들에게 일본인이라는 북한에서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잘 했는데 지금도 일본인이 많거든. 근데 일본인 처는 지금 없어요. 그 때 제일 나이 어려서 일본인 처가 간게 한 24살 그 사람들도 지금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겠나

F: 80세 90세 가까이 되셨겠죠.

M: 그 나이면 북한에서 평균수명 더 이상을 살 수 없어요.그런데 9만3340명 중에 1800여명의 일본이 처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없다고 치자 그 자녀들도 일본인 처로 등록되어 있어요. 6830명이라 했어 그게. 1800명 하게되면 5000명은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 또 일본인의 자녀도 일본인으로 인정 해준다면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의 자녀들이니까 20살에 간 사람은 없을 거야 기껏해야 18,15에 갔을 거야. 그 사람들은 남아있을, 생존력이 굉장히 농후해. 이 사람들에 대한 자유왕래 라든가 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해야해 그것과 동시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고향은 태어난 곳은 일본이지? 우리 부모들 고향은 한국이지? 하니까 내가 항상 말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맨날 일본으로 생각한다. 마음의 고향, 항상 잊지 못하는, 내가 태어난 곳은 일본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도 세계 인권선언 3조인가 2조에 그런 게 있어. 자유로이 오고 가고 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렇게 되어 있잖아. 그럼 북한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도 돌아갈 권리가 있어요. 또 받아줘야 할 의무가 있고. 이걸 지금이라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데. 그럴려고 하니까 지금 내가 제일 미흡 한 게 뭐냐면 지금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살아 있겠나? 그런 거야.

지금 북한에 그 사람들 조사해서 먼저 그거를 세계인권위에도 상정시키고 그렇게 해야 하는데 일본 적십자사에서는 매년 몇 차에 갔으면 몇명이 간거는 있더라고. 근데 나이별 통계가 있으면 그거를 추상해 낼 수 있잖아. 59년도에 뭐 1살에서 몇 살까지, 10살은 몇명 갔다. 이 사람들 지금 몇명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걸 해야하고 그 다음에 동시에 우리는 일본에서 탈북 해온 사람들에게서 너희들 북한에 갈 때 가족이 몇명 갔으며, 죽은 사람 몇 명인가, 지금 몇명이 살아있는가 탈북자를 통해서 몇명이 살아있는지는 우리가 조사 할 수 있거든 조사 하게 되면 지금 탈북자는 한 100명이면 100명, 20명이면 20명 중에 조사하니까, 그 가족들 50명이 귀국했는데 그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20명이더라. 그럼 20%는 살아 있다는 거지 그것과 함께 적십자사에서 통계자료, 추상적인 통계자료 한국과 대조해서 하나의 데이터로 만들면 그 정도 살아있다. 알 수 있잖아. 그걸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내 물어봤어요. 적십자사에서는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국민이 요구 할 때는 알려주게 되있다더만, 조사 할 수 있데 돼있더라고, 그거를 일본이 좀 해주지 않겠나. 리나상 나는 여기서 탈북자들에 대한 가족이 얼마나 살아있는지 조사 할 수 있거든 하나의 완벽한 데이터가 될 거 같아. 그렇지 않아? 그거 한번 좀 해 보자.

F: 그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죠, 해야만 할 것 같아요

M: 해야지, 그래야 이케다 후미코가 하던 일은 연속으로 할 수 있어. 그래서, 이케다 후미코를 내가 몇 년 전부터 찾고 해달라 했는데, 도저히 그 사람은 나이를 먹어서 안된다 하는데 사무국장이 있다는데, 그 사람도 아니더라고.

**

M: 어쨌든 고생 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귀국이라는, 귀국 시련, 북송 이게 내 일생의 최고의 피해,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모든 게 다.

F: 한가지 궁금한데 부모님께서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역시 귀국을 원하신 것은 혹시 일본에서보다는 고향 땅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세요?

M: 고향은 북한이 아니잖아.

F: 아니잖아요.

M: 그래서 내가 말한 거는, 그 사연은, 동기는 9만가지가 있을 거다. 93340명의 이유가 다 자기 나름으로 사연이 있어요. 그거를 하나 쓰게 되면 굉장한 게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정치 문맹이야. 아예 몰라.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 이거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야. 근데 한문 서당을 10년 다녔어. 맏아들이라고 해서 공부는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냥 귀국이라는 완전히 폭풍이 불지 않았어? 일본에서 보내려고 북한에서는 오라고 하고 그걸 또 보내려고 하고, 한국에서는 받으려고 안했고. 그때 한국에서는 안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건 모든 게 다 그쪽으로 쏠렸어요. 그래서 갔던거고. 갔던 이유도 있지 않겠나. 우리 아버지는 60년대 당시 한국을 굉장히 못 살고 또 정치적으로 불안 했어. 정치, 경제가 완전 불완전 했어. 그래서 이승만이 60년 4.19때, 우리가 60년 5월에 갔거든 북한에, 그만큼 그때 정치는 굉장히 나빴어. 일본에 보내려 하고. 조총련이 북한은 오라고 했고, 조총련은 완전히 돌아가면서 동포 찾기 해가지고 속속들이 찾아서 보내고, 한국에서는 오지 말라고 했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그 때 1~2년이면 한국이 통일 된다. 북한 주도 하에서 통일 된다 했거든. 이게 다 거짓말인지 몰랐지. 다른 가람들이 일반적으로 듣기에는 그런 말을 왜 믿어, 그런 말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조총련에서는 별의 별말 다 하면서 보내려 했거든 이제 2년 있으면 통일 된다. 북한 주도에 통일 된다. 그니까 북한에 빨리 갔다가 통일 되기만 하면은 빨리 한국 고향에 가겠다. 우리 아버지는 그랬어요. 참 말도 안되는 생각 가지고 갔단 말이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사연이 있지만, 우리 아버지 생각은 빨리 북한에 갔다가 거기서 한국으로, 고향으로 가겠다. 그게 제일 빠르다. 그래서 그렇게 했지.

F: 누나나 형이나 어머님도 그러셨고 반대를 가족 내에서 하신 분은 안 계셨어요?

M: 우리 맏형이 18이었거든 그때, 우리 누나가 15, 우리 작은 형이 11살, 내가 9살. 그니까 그걸 반대하고 그럴 나이가 아니잖아. 부모의 의향을 따라야 할 나이니까. 우리 맏형도 그때는 큐슈 朝校인가 거기 다녔어요. 거기 다녔는데 거기서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 조선학교 다닐 때도 그런가 보다 하는거지. 좋은 것만 봤고, 선전만 들었으니까, 김일성 장군은 바다 위도 완전히 막 걸어 다닌다. 그런가 보다 하지 뭐. 장군은 장군이로구나 하고.

F: 또 귀국을 준비 하실 때, 짐 정리 하거나 그러셨을 것 같은데…

M: 그때 처음 갔을 때, 1차, 2차인가 그때는, 낡은 짐을 많이 가져가서, 쓰던걸 다 가져가서 평양 거리가, 그 깨끗한 거리가 쓰던 물건 가져가서 완전히 어지럽힌다, 더럽힌다, 새것만 가져가라 그래서 낡은 거는 놔두고 새것만 가지고 갔어요. 새것만 가져갔는데, 우리는 갈 때는 다 2개 씩, 자전거 2개, 사진기 2개, ミシン,밥솥, 뭐 다 2개씩 가져가서, 새것을 가져가서 남은 돈이 90만엔 있었거든? 그걸 또 기부하라고 해서 기부까지 했어요. 그때 90만엔 이면 굉장한 돈이야. 그걸 상장을 또 이렇게 주는데, 그 상장이 굉장했었어.

F: 내용이, 어디서 나온 상장이에요?

M: 조총련에서 조총련에서 그때 돈 필요 없으니까 다 새 것을 가져해라, 짐도 필요 없다. 짐도 많이 가져갈 필요 없다, 남은 돈은 여기 다 기부 하고 가라. 근데 어떤 사람들 말하는 거 보면 기부했다 나중에 준다고 증명서 줬다는 말도 있고 하는데,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 근데 우리는 기부 했으니까 상장을 주더라. 그니까 상장을 받아가지고, 애국 활동 했다고 하면서 북한에서는. 그 가기 전에는 우리가 한 보름 동안인가 우리 맏형 하고 나하고 작은형 하고 남자들, 우리 누나는 우리 동생 데리고 다니면서, 진짜 마지막 자유지. 뭐 사고 싶은 거 사고 보고싶은 거 보고, 그때 보지 말라고 그랬어, 영화도 못 보게 한 댔어요 우리 부모님들이 영화 보고, 영화관에 그때가 못보게 하고 자유가 많이 안 주었데 원래.

F: 일본에서요? 애들에게 그렇다는 말씀이세요?

M: 근데 마지막에는 영화도 보고, 다 하라고 해서, 그래서 가기 전에 실컷 먹기도 하고, 가지고 싶은 거 하라고 해서, 나는 그 야구게임 하는 판이 있어요. 파칭코 같은 그런 거야. 그걸 샀다 했고, 우리 맏형 하고 누나는 오르골, 그게 아직 까지 있어. 그것도 샀고 우리 동생은 어릴 때니까 눕히면 눈 감고 하는 베이비 인형 있잖아. 눈 감고 세우게 되면 눈 딱 뜨고, 그런 인형 사달라 했고.

F: 그걸 가져가셨어요?

M: 가져갔지. 마지막까지 일본이라는 나라를 그때 그 광경, 일본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귀중품이 됐지.

F: 부모님과의 추억은 많이 없으신가 보네요? 일본에서 형들이나 누나랑 함께 다니는 추억들은 있어도, 부모님은 역시 바쁘셨나 보네요? 장사 하시느라.

M: 우리 부모님은 바빴어요. 장사하느라 바쁘고

F: 어디 놀러가시거나 그런 추억이 있으세요?

M: 나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와서 같이 다니고, 그것도 생각 나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장사하고, 바쁘게 돌아갔어요. 그리고 자기네 끼리 다니면서 이렇게 논 것도 있지. 조선 사람들끼리 어디 가서 잔거, 집에서 놀고, 그런데 우린 일체 그런데를 못 따라 갔으니까, 데리고 가고 이런 것도 하나도 없고. 사진을 보면 그런 것도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또 개고기를, 개를 잡아서 자기 친구들끼리 먹고, 뭐 그런 것도 있고. 우리는 그런데 따라 가거나 못했으니까, 그 일본에서 개가 한때 많았는데, 돌아다니는 개가, 유기 견 개가 많았는데, 잡는게 아직도 생각나. 그 잡는게 시운 차 같은 데다가 채찍같은 걸로 지나가는 개를 휙 잡아가지고 끌고 가서는 살창 안으로 휙 던지는데, 재간은 재간해. 그 가져가서 동물원 사료로 쓴다 하더라고. 그때는 유기 견이 많았어요. 내가 그때 몇 살이야?아마 58년도 그때 유기 견이 많았어요. 근데 지금은 이런 표시를 해야하지만, 목걸이 이거 없는 거는 다 유기 견 아니야? 근데 그때 당시 유기 견이 돌아다니는게 많았어요. 지금은 없잖아. 그때는 많았어 그러니까 그걸 잡아다가 동물원 사자 밥으로 주고, 우리 집 앞에 지금도 그 생각은 나. 부모들 하고는 크게..자기네 돈벌이에 집중하고

F: 마지막 자유는 부모님께서 주긴 거세요?

M: 부모님이 돈 주면서 이제 북한에 갈 텐데, 조선에 갈 텐데, 마음대로 살 것 사고 놀라 하고, 한 1주일, 보름쯤 놀았을 거야. 그때 갔을 거야 おばけのいえ그걸 뭐라하지? 들어가면서 막 나오고,

F: お化け屋敷?

M: 나는 들어가다가 처음 그거보고 너무 깜짝 놀라서 못 들어가고 우리 형이 들어갔는데. 그걸 그때 봤구나 자유시간에, 마지막 자유 날에

F: 추억에 깊이 남아 계신 것 같네요. 학교는 언제까지 다니셨어요? 조선학교는? 귀국이 결정 나고 또 니가타까지 이동을 하셔야 하잖아요.

M: 가기 전에 내가 5월 20일에 청진에 도착했으니까, 한 5월초까지 다녔겠지?

F: 그럼 마지막에 이별 행사 같은 건 있으셨어요?

M: 있었지. 다과 놓고, 책상 쭉 마주 놓고, 선생님 말 한마디 하고, 다과회 했어. 우리 마지막 갈 때.

F: 방금 전에도 말씀 하셨을 수도 있는데, 같은 학교나 반의 친구가 있었던 건 없었어요?

M: 1명 있었어. 1명 같이 가서 같은데 배치 받아서 1명 있었고, 그 사람도 그때 군대 나갔다가 와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한 사람은 남포에서 유도 선수로 있다가 거기서 나와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 1사람은 농촌에서 농사 짖고 있고, 1사람은 어디도 안 다니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이 하고 있더라고.

F: 그런 즐거우시던 일본의 추억들을 벗어나서 귀국 얘기를 들어야만 하는 것에 저도 긴장도 되고 그렇기는 한데, 중요한 말씀, 그러면은 그러다가 니가타 쪽에 가족들 함께 가신 거죠? 새것 들고 그 새로 구매한 것들 다 들고?

M: 들기는. 다 부치지

F: 들고 간거는 그 야구 판 들고 가셨겠네.

M: 야구 판도 부치고, 내가 가방을 들고 갔던가? 나는 이렇게 가방을 매고 학교 다녔으니까 가방도 안 맸다 난.

F: 가볍게. 열차 타고 가셨겠죠 그때 당시에는?

M: 기차 타고 갔다가 니가타에 가서, 어쨌든 나는 무슨 생각 나냐면, 거기서 한 몇일 있었던가? 한 3일 있었나? 근데 큰 창고 같은게 있는데 거기서 다다미(일본어)쭉 깔고 완전히 재난 인원 수용하는 거 같은, 그런 감이야. 지금 보게 되면. 옹기종기 가족단위로 누이고 또, 그 옆에 다른 가게 체육관이 있더라고 농구도 있고, 배드민턴도 하고, 뭐 그런 것도 있고. 근데 나는 거기서 참새를 잡았던 기억이 도 있고. 크게 기억은 뭐

F: 거기는 적십자가 준비한 그런…?

M: 네

F: 네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기다리다가 배를 탑승하신 거에요? 배의 이름 이라던가 기억하세요? 선생님

M: ドボルスク호 인데, クルリオン하고 ドボルスク 있는데 일주일에 하나씩 계속 이렇게 엇바꿔서 갔었거든 그때가. 처음에 배가 온다 해서 갔는데 배가 사다리 저 옆에 내리고 하니까, 북한에 간부가 왔다 하더라고, 간부가 머리 새까맣고 옷도 이런 거 입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에 러시아 옷들이 그렇게 크고 바지 가랭도 이렇게 넓었어요 다. 어쨌든, 그런 옷을 입고 왔는데 환영회인가가 있었어 연설도 하고, 뭐 어쩌고 하는데 말도 잘 모르니까 박수 막 치고. 그러다가 그렇게 환영하고 그 다음에 배에 올랐지?

F: 그때 가장 기억 남는 풍경이다든가, 마지막의 일본 땅…

M: 그때는 막 울고불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는 우리 둘째 형하고 테이프를 동그랗게 말은 거 쫙 던졌는데, 들고있다가 가다가 전부 끓어지고, 그게 마지막이고, 근데 뭐 별의별 사람 많데, 그때 어린 마음에 그냥 이게 이별인가보다, 이런걸 이별이라고 하는 거구나 이 정도, 우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가지지. 누구 찾는 소리도 나고. 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보니까 “조선사람들 내리지 말아”이건 들리지도 않을 거 기자들은 그런 거를 좋아하겠지 만은, 그건 아니야. 바글바글 하지 뭐. 보면 저기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손짓 하는 사람, 꽥꽥하는 속에서 그냥, 이런걸 환영이라고 하나, 환영과 이별, 우는 사람 보게 되면 저건 이별, 손 막 흔들고 찾는 거 보면, 환영. 뭐 이런 식이지.

F: 선생님은 그나마 가족 분들과 함께 가신 것도 있고, 슬프다는 감정은 없었겠네요?

M: 우는 사람 보게 되면 슬프지고, 그걸 받아 드릴 뿐이지, 내 자체로서는 우리 가족도 다 가고 하니까.

F: 형이나 누나 분, 뭐 친구랑 이별하거나, 그런 것도 있을까요?

M: 우리 형, 부모들 그래도 키가 크고 난 작으니까 올려 보지도 못 했고, 난 장에 들어가 볼 뿐이고, テープ던지고, 그럴 뿐이지

F: 처음 보는 것들, 자극적인 풍경이셨겠네요. 사람도 많고. 그때 청진까지 하면 한..

M: 3일. 2박 3일 이라는데, 러시아 배가, 러시아 사람이 그 배를 몰고 오더니, 그 안에 러시아 사람들이 다더라고. 근데 거기서 우리 맏형같은 사람들은 거기서 노래도 배우고, 러시아 노래. 배우면서 갑판에서, 애들도 좋아해요 그 사람들. 그래서 같이 막 놀던 생각도 나고. 근데 재일 싫을 때는 밥 먹을 때야. 왜 이렇게 밥 냄새가 고약하고, 밥이 시꺼멓고 거기다 제일 기억 나는 거는 주먹같은 사과, 빨갛지도 않아요. 시퍼런거, 먹지도 못 할거, 푸석푸석한 거, 그런 거 주는, 밥도 그 안에서 못 먹었어요. 반찬도 그래, 냄새가 싫고 고약하고 침실도 냄새 나지,

F: 익숙하지 않은 밥이랑 느낌이 나는, 잘 준비가 안된 그런 느낌이셨어요? 좀 어렸을 때 기억이기 때문에.

M: 아니지. 북한에 쌀은 다 그래요. 북한의 쌀은 다 검고, 뭐가 많아. 근데 일본에서 보게 되면 쌀이란 건 하얗고, 쌀이라면 다 그런 걸로 알고있어. 어렸을 때는 벼 라는 것도 모르잖아. 그냥 그게 이렇게 나는 건가 보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배에서 보니까 새까메. 검고, 정말 냄새가 나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햅쌀이 아니라 2년, 3년된 오래된 쌀. 오래된 쌀이니까 붉기도 없고, 검해요. 그리고 냄새가 나. 하니까 곰팡이 냄새같은 그런 거. 하여간 오래 되었으니까. 근데 북한에서 그땐 다 그랬댔어. 북한의 쌀은 다 그렇더라. 배급 해 주는 거 봐도 다 그래. 지금 여기서 쌀을 먹어보게 되면, 10분도라고 하나? 그때는 60년대 당시에는 북한이 굉장히 못 살았었으니까, 그게 제일 기억에 남고, 밥, 사과, 소련갑판에서 사람들 하고 놀던 생각, 그런 거. 말고는 가른 거는 생각 안 나. 그 다음에 한 10시쯤 된 것 같애? 아침에 3일만에 누가 “조국이다!” 하더라고. 하니까 사람들 막 나와서 보는데, 먼 데서부터 보지 지금. 근데 호기심이 나서 막 보지 않겠나? 쭉 보는데 창고같은 부두가 많잖아? 그게 새파란 거, 보니까 꽃 들고 환영 나온 사람들 보니까 하나도 잘 생긴 사람이 없어요. 다 하나같이 검고, 햇볕에 했는지 검고, 대학생들이 왔는데 그때 회색 교복입고. 그 다음에 꽃, 종이로 만든 거. 환영하고, 그때 재일 동포 환영의 노래라고 있었어요. 그 노래를 막 부르면서 하는데, 사람들 배에서 배라 그래도 분간을 하잖아 사람이? 보니까 하나같이.

거기서 뭐가 들리나 하면, 일본에서의 이별의 송별회와 북한에서의 환영 모임과 그게 완전히 달라요. 일본에서는 자유자재로 하는데, 북한에서 그거는 많이 안 나오고 조직적으로 나온 거에요. 다 검고, 일본에서 사람들이 송별회 그 화상은 진정이 넘친다면, 북한에서 그 환영 인파의 얼굴들은 할 수 없이, 로봇같은 지시, 명령에 의해서 할 수 없이, 막 좋아서 웃는게 아니고 그냥 무의미 하게. 그니까 이게 자유와 독재의 차이라고 봐야지. 명령과 자유, 이런 차이지. 하나도 이렇게 생기가 없지.

F: 어렸을 때 느낄 정도라면 정말

M: 딱 보면 알아요. 누가 뭐라고 안해도 딱 보면 알아요. 그니까 사람들이 新潟에서의 송별회는 진짜 진심이 나오고, 흔들고 하지만은, 여기 와서는 울었지 사람들이. 이런 거인가? 그러나 아직까지 지상낙원이 남아있지 머리에는. 설마, 근데 이상하다 이렇게. 이거 나쁘다 이게 아니고, 이거 이상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촉이, 느끼는 감정. 그 다음에 내리자 마자 ガルシア라는 버스를 대줘요. 그 자동문 쫙 열리고, 그때 좋은 그 만에도 차로 되어있었겠지? 그 다음에 환영 모임을 하러 가요. 화영 모임을 하러 회관 같은데. 가서 거기서 관현악단이 막 하고,연설도 하고, 환영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테이블이 둥그런데 가족단위로 안게 만들었더라. 근데 가운데 다과가 있는데, 그 다과가 완전히 돌덩이야. 일본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 하던 거. 밀가루 색깔도 갈색, 똥 색 나는 거 뚝뚝뚝 잘라 놨는데, 먹어보니까 하나도 달지도 않아. 그걸 또 과자라고 내놨어. 그래도 우대 해 준다고 내놨겠지. 우리 동생 그거 먹고 똥이라면서 버렸어. 똥 색이 나는 거까. 나도 보니까 꿉꿉 하더라. 먹지도 못하고, 그래서 과자가 이렇구나 또 알았지.

배에서부터 사과, 밥 이런 거 알고, 오면서 사람들 보고 느끼고, 과자 보고 느끼고, 하는 거 보고 느끼고. 이제 점점 느끼는 단계이지. 그런데, 초대소에서 1주일 정도 있을 거야. 한 5층쯤 되던가?4층 되던가? 초대소 앞에 이렇게 지도 그려놓는 게 하나 있어.배치 해주지. 먼저 어디 가라고 해요 거기서. 보고 오겠다 해서 내려왔는데, 지도에 보니까 제일 위에 더라고. 근데 우리는 일본에서도 제일 밑에, 한국에서도 밑에서 살았는데, 따스한데 아니면 우리 못산다. 그래서 우리가 평안도에 가게 되었지. 그때 우리 먼저 온 한 나이 먹은 사람이 17,18됐을거야. 그 사람이 와서 우리보고 일본 학생복을 입고 왔더라고, 그래도 새까매요. 먼저 와서 못 먹어서 그런지, 햇빛에 타서 그런지 근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이제는 너 이제 고생이다. 우리는 그 호기심에 물어보거든 저저마다, 일본 자본주의 사상이라고 하고, 일본말도 못하게 하고, 어쩌고 저쩌고 말하더라고. 밥도 뭘 주나 빵같은 강냉이 밥 주고 어쩌고 저쩌고. 우리는 그래그래 감추하는 단계지. 내가 그래서 말하는 거는 그때 일본 연필 쓰고 일본 책을 쓴다 해서 자본주의 사상이 들어온다 한 거는 내가 배치해서 가서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거 없었어.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있었길래 그렇게 말했겠지? 대학에 다녔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일본에 도망치려고 왔다는 거야. 어떻게 도망치냐면 이 배를 미리 타고 있으면 일주일 있다가 가는데, 일본에 간다는거야. 그럼 자기 도망치겠다. 그러면서 왔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근데 그렇게 못가지.

F: 어른들이 했던 대화나 그런, 기억에 남는 대화 같은 게 있으면…

M: 어른들 대화는, 그렇게 말 많던 사람들도 말을 안해요. 계속 보고 있지.

F: 초대소에서도 그랬어요? 가만히? 噂話 같은 거는 없었어요 주변의 어른들이?

M: 다른 건 없었어. 이제부터는 여 살아야 될 거는 뻔한데, 그 다음에가 또 문제야. 처음에는 일본에 속상하고 먹을 건 없고 이렇게 되니까, 술도 많이 마시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술 많이 마셨어요 처음에는. 집에 가서는. 마음의 고통을 술로 달래지. 그러다가 이거 이러다가 안되겠다. 술도 돈이 있어야 먹고 그러니까, 일본에서 가져온 거 팔아먹기 시작하다가, 정신 차리고 살자.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걸 많이 느끼게 돼요. 67년도인가? 그때부터 잡혀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여기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바깥에서 보고 들은것은 절대 말하면 안된다.

F: 그런 건 주로 누가 가르쳐 주는 거에요? 주변 어른들이? 먼저 온 귀국자? M: 먼저 온 귀국자가 아니라, 우리 말 잘 못해서 잡혀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좀 좀. 우리 부모들의 十八番이 어디 가도 누가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누가 본다 하고 생활하라. 빈 방이든,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있다고 생활 하라. 그만큼 양심적으로 솔직하게 생활하라 이거인데, 북한에 가서는 우리 부모들이 가운이 절대로 말 하지 말라. 보고 들었다고, 자기생각을 그대로 말 하지 말라. 그러면 다 잡아간다. 절대로 말하지 말라. 그리고, 물어봐도 그대로 답변을 하지 말라. 바보라고 취급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지 말아야지, 물어봤다고 해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잡혀 가기라도 하면, 잡혀가는 것 보다 바보가 낫다는 거랑, 절대로 그대로 말하지 말라. 그 다음에 삶을 보면, 다 거짓말이지 바른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렇다니 까요.

F: 그럼 부모님을 보시면서 선생님은 기억하시는 선생님 스스로의 감정 이라던가, 말로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느끼던?

M: 하나하나 배우는게, 내가 학교 다닐 때, 그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교과서가 있는데, 그 뒤에 뒷장에 김일성이 그려봤단 말이야.

F: 그거 초등학교 다니셨을 때?

M: 아니아니, 북한에서. 근데 그걸 보고, 나를 도와준다는 세윤이라는 놈이 선생님한테 고자질해서 내가 한번 불려가서 욕먹었지. 그렇게 되면서, 아 김일성이 초상화에 대해서 낙서하고 이렇게 하면 안돼는 모양이로구나. 이걸 하나 또 배우고,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이 세뇌되는 과정인데, 세뇌는 어렸을 때부터 모를 때부터 세뇌해요. 이제 아는 사람은 세뇌가 안돼요. 그니까 그대로 조심할 따름이고, 말 안할 따름이지. 그니까 김일성이 위대 해서가 아니고, 이렇게 되면 이건 안되는구나 하는 거를 하나하나 배워가지. 뭐 그러다가 내 윗반, 그 사람도 귀국자인데 말 잘못해서 잡혀가는 것도 봤지, 말 잘못한 다는게, 자기 친구가 술 사다 주고 말 시킨단 말이야.

**

M: 내가 살았던 곳에서, 그 평양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한 25집이 있었나 귀국자의. 25집인가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가족을 보게 되면 보통 5명, 4명 다 있었지요. 가족이 5명정도 있었지요. 우리가 7명이었으니까. 가족이 자식들 5명에 어머니 아버지 해서 7식구 였거든요. 근데 7식구는 대부분 다 그렇게 있었어요. 근데 7식구는 다 대부분 있었어요. 그러니까 못해도 한 100명… 100명 넘게 살았죠.

F: 한 아파트 같은 건물에서요?

M: 아니 마을에서

F: 마을에서요. 네네.

M: 근데 그 중에 잡혀간 사람이, 내가 마지막에 지금 이렇게 정하게보면, 말을 못해서 그렇게 잡혀간 사람이 1명있고, 잡혀간 사람이 2명, 그 다음에 탈북하려다가 도망치려다가 잡힌 사람이 한 2명 있고, 그 다음에 또 비라, 전단지 뿌렸다고 모함에 걸려서 잡혀간 사람이 1명. 그 다음에 무슨 사기쳤는지 도둑질을 했는지 해서 1명 잡혀갔어. 그것도 말 잘못해서 잡혀갔어. 그런 사람이 1사람 있고. 그리고 도망치려다 잡혀간 사람이 또 1명 있구나. 그래서 3사람 있고(탈북, 도망). 강 쪽으로 잡혀가고. 어쨌든 100중에 15… 10몇 명은 잡혀갔거든. 그렇게 보면 많이 잡혀 갔어.

근데 그거 이제 잡혀간거 그거를 이제 따지게 되면, 아까 말마따나, 말이라는 게 보위부 정보원이 원래 보위부라는게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 보위부에서 내가 너를 정보원으로 쓰겠다 하면 데려가서 그 자술서, 아니라 뭐라그러니, 갑자기 잃어버렸다. 그걸 쓰게 해요, 종이에. 진술서가 아니라 그걸 쓰게 하거드니. 그 첫번째가 위대한 수령님을 무슨 뭐… 목숨을 뭐… 보위한다. 두번째.. 뭐 어떻게 한다. 이게 10가지가 잇대요 그게. 그런데 들은 말인데 그거를 쓰고, 그 사람들이 그 때 당시에는 한달 30만원 정도의 활동비가 나왔어요. 그러면 그거 가지고 돈을 주면서 누구에게, 자기가 지목한 사람이 있으니까 거기에 너가 술을 사가서 가서 거기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 봐라. 그리고 무슨 말을 하게끔 유도해라 이러거든. 그래서 술 사가지고 가서 먹다가 보면 술에 취해서 별말 다한다.

너는 어디에서 살았니.

일본 어디에서 살았다.

일본 어떠니.

야 참 좋았다.

지금 어떠니 하면.

지금 못살겠다.

너 일하러 가라면 가겠냐.

가지 난 일하러.

그 일본에 좋아? 사회주의가 좋아? 자본주의가 좋아?

자본주의가 좋지 뭐.

이런 말이라도 하게끔 걔가 그렇게 해서 잡혀갔어요 군에. 내가 이거를 어떻게 아냐면 우리 형 이랑 동창이었는데 그 얘가 그리고, 그 집 그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랑 가깝고.. 가깝게 다니거든요. 근데 너가 앞서 한마디 하게 되면 귀국자라고 하게 되면 어… 그 일본에서 왔다 해서 지금 같은 동심이라고 해서 많이 솔직한 게 있어요. 통하는 게.

그래서 그 다음에 말하는 게 누구 때문에 잡혀 갔다. 술 사가지고 와서 자기 아들하고 술 먹고 할 때 그런 말 많이 시키더니 잡혀 갔다. 그래서 말 잘못해서 잡혀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근데 뭐 잡혀가는 형 친구는 다 그래요. 저녁에 와서는, 퇴근해서 집에서 잘 때, 저녁에 와서 그냥 나오라 해서 나오면 그냥 잠옷 바람으로 그냥 데리고 간다고. 다시 들어가서 트렁크에 옷도 싸고 이런 것이 하나도 없어. 그냥 그 자리에서 데리고 간다고. 근데 그거는 간첩을 잡아간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서. 많아요 그렇게 잡혀간 사람이.

F: 그런 말씀이셨구나. 알겠습니다. 그게 선생님께서 기억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잡혀 가셨다고 하는게 선생님께서 몇 살 때쯤 얘기이죠?

M: 60년도는 없어요. 도망치다가 잡혔어도 그때는 교양 대상자라고 해서 교양을 하지 잡아가지는 않았어요. 잡아가는게 내 기억으로는 67년도 부터였어요. F: 예, 감사합니다.

Interviewer: Rina Hong

Interviewee: Lee Tae Sik

Tags & Keywords


Transcript Notes


  1. Arduous March refers to the North Korean Famine from 1994-1998.

  1.  How does the diversity of political opinions and alignments within Lee Tae Sik's family challenge the traditional ideas of ideological bipolarity in Cold War historiography? Consider its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Cold War in the Korean Peninsula and Asia more broadly.

  2. What does Lee Tae Sik's continued determination to defect despite having served as a North Korean soldier suggest about the extent and success of ideological indoctrination within North Korean society during the Cold War? Consider its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Cold War in the Korean Peninsula and Asia more broadly.

  3. In light of Lee Tae Sik's experience in North Korea, consider the extent to which the Cold War (in Asia and beyond) was a clash of visions and images that civilian communities were being shown, rather than a clash of id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