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Haeng Il (pseudonym) discusses his early life growing up in Japan, his disappointment upon returning to North Korea, and his efforts to escape and discourage fellow Koreans in Japan from returning to North Korea.
Kim Haeng Il was born in 1941 in Aichi Prefecture. His father was born in Gyeongsangnam-do (South Gyeongsang Province). His parents met in Japan and got married. The family lived in Aichi working for a spinning mill run by his mother’s relatives. His father sent him to Chōsen gakkō (schools for Korean residents in Japan). When he was in the third grade in 1949, the school was closed due to repression. He was not able to go to school for three years. He studied at home and practiced Kendo and Judo. Seeing his school shut down, he learnt that no one would protect him from being bullied by the Japanese.
After three years, the school re-opened. Although Haeng Il resumed his education at junior high school, he skipped most classes because he felt something was wrong. He continued doing so at high school. He socialized with a gang of older Korean delinquent friends in pachinko parlors and behind nightclubs every night. Back then, he fought with Japanese delinquents a lot. He thought he needed to be strong.
After graduating high school, Haeng Il helped his father with his work for a while. His father was an active member of Chongryon and was instructed to send his son “back" to North Korea. Having connections with Mindan, his mother was against it and thought he should not go. Haeng Il ran away from home and from his father’s orders. His old delinquent friends in Aichi sheltered him, so he could avoid it. One day, his father found him. He told his son to come home and promised that he did not need to go to North Korea. Haeng Ilwas relieved and went back home. However, he started thinking that this was the Chongryon headquarters' fault and that his parents were suffering under their orders. He returned to North Korea alone, seeking the truth. He wanted to see it for himself without his family. If it was not a "paradise on earth," he was determined to escape immediately.
He went back to North Korea in June 1961. As soon as he arrived at Chonjin (청진) Port, he found that it was not a “paradise.” Upon his arrival, he heard his father’s colleagues, Chongryon executives, saying in the repatriation camp that it was a mistake. He realized that they had not known the truth either. He decided to try to stop the next repatriation ship somehow. During his stay, He was assigned to a factory in Rason (라선) located further north, where cold winds blew even in summer. His father told him that he could go to university if he returned, which did not come true. While he occasionally reported for work in the factory to avoid raising suspicions, he plotted his escape, checking maps etc.
To make the most of this opportunity, he went to Pyongyang to see more of the country. He spoke with some returnees there who arrived the year before. None seemed to have a satisfactory life. The city itself appeared boring, with nothing to do. As he was in Pyongyang, he had some cold noodle soup and left the city. He proceeded towards the south along the railway. He ran for his life at night. He hid and rested in dark corners during the day. Back then, the barbed wire fences did not cover as much as now. He believes there were mines on his path, but fortunately did not step on any.
After walking for a week, he had reached his physical limits, despite having good stamina. At that time, he heard a broadcast from South Korean troops. He sprinted in its direction. The yellow signboard read, “The 38th Parallel.” He found human footprints and followed them, crossing the 38th parallel, where troops gave him protection. He had traveled to North Korea in June, and successfully escaped from Pyongyang in September. He was welcomed in South Korea as a Gwisunyeolsa (defector). On the other hand, he did not enter Japan fearing for his life. Hoping to stop the next repatriation ship, he wrote about his experiences and proactively appeared in the media. In retrospect, he is happy that his actions deterred some returnees in 1962 and beyond, though he regrets being unable to stop the ships. His greatest regret is that he can no longer live with his family in his hometown, Japan for the rest of his life.
F: Interviewer
H: 김행일 Kim Haeng Il 金幸一
F: 성함이 H 선생님 한자가 어떻게 되시죠?
H: 행자는~~~.
F: 좋은 이름이시네요. 일본에 지내셨을 때, 통명(通名) 쓰셨어요? 일본 이름?
H: 잘 안 썼어.
F: 있긴 있었는데? 집 안에서는 잘 안 쓰셨어요? 재일 동포 중에 장사하려면 日本人 적하고, 그럴 사람도 있잖아요. 혹시 선생님 집은 어떠셨어요?
H: 우리는 일본 학교를 안 다녔어요. 조선학교. 조선학교 초등학교 가고. 그 다음에 중학교 고등학교는 조청년 학교인가?
F: 네. 선생님이 태어난 거는 몇 년도이죠?
H: 41년 10월 7일
F: 무슨 조선 학교죠? 愛知의?
H: O朝鮮学校.
F: 愛知에 학교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런 거는 제가 잘 모르네요. 쭉 초급부터?
H: 초등학교가 조금 다니다가, 우리 한국 6.25 그때 민단하고 조청년이 갈라진 거야. 그래가지고 이 학교가 조선 학교다. 한국학교다 이래가지고 서로 다퉜었지. 그래가지고 초등학교가 없어진 거야.
F: 한국학교다 그런 것도 있었어요? 그때 아이치현의 학교의 현황을 잘 몰라서 그런데, 예를 들어 조선학교는 다 배제 시켰잖아요. GHQ가. 일본정부도 나가라, 나가라 하고 그게 기억 하세요?
H: 그건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니까. 근데 조선학교가 우리는 名古屋에서 조금 떨어지거든, 愛知県은 愛知県인데. 그게 한 3학년 다녔나? 그럴 거야. 3학년 다니다가 6.25나는 바람에 서로 다투어가지고. 조청년, 국민당. 그때는 국민당이라고 하지도 않고, 한국이라 그랬지?
F: 한국이라 하셨어요?
H: 한국이라고 하고 조청년은 조선이라 하고
F: 그랬죠. 서로를 인정 안하고
H: 그때 당시 일본 정부에서 証明書 그거 내줄 적에 국적이 어디냐 그러면 대부분이 전부다 조선이라 그랬다고. 그래서 조청년이 그렇게 많아진거지.
F: 48년이면 선생님이 만으로 7살때 그쯤이군요. 그때 선생님 입장에서는 자기 국적이 뭔지 그런 거는 잘 모르셨겠다.
H: 모르지.
F: 그냥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
H: 전부다 조선이라 그랬어.
F: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조국이 조선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H: 그냥 조선이란 것만 알고있지. 별 다른 거는.
F: 초등학교 3학년 까지는 배우고 6.25일어나서. 그럼 학교는 어떻게 된 거에요? 못 다니게 된 거에요?
H: 어.
F: 그래서 일반 학교를 다녔어요?
H: 일반 학교도 못 다녔어 그때. 그니까 중학교 때 다니고 그랬는데, 중학교 때는 학교 가니까 이상한 말만 하고, 빨치산이 어떻고 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역사를 배웠는데, 그때 가니까 역사가 공산주의 역사. 그 안돼 그래서. 그때부터 학교를 잘 안 갔어 그래서.
F: 잠시만요. 제가 정리를 할게요. 이제 그럼 3학년 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를 못 다니게 되어서 그러다가 중학교에 또 들어가게 된 거에요? 몇 년 뒤에? 그럼 공부를 3년동안 못하고?
H: 그렇죠. 왜냐하면 아버지 원래 사상이 일본학교를.
F: 못 가게? 가는게 아니다?
H: 왜냐면 일본 학교 가면 いじめ를 하거든. 그래서 나도 안 간다 하고, 아버지도 가지 말라 하고.
F: 그럼 3년동안 어린이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4,5,6학년 때는 가장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기이고…
H: 그냥 집에서 공부한 거야.
F: 선생님 스스로 공부 하셨어요? 어떻게 교과서 그런 걸 구해서?
H: 옛날 교과서지
F: 그건 정말 대단하시네요.
H: 그 다음부터는 학교 간다고 보따리,가방만 들고 나가지 학교를 안가는 거야. 집에서는 학교 다니라 하는데, 나는 학교를 안 가는 거야.
F: 뭔지 알겠어요. 이러다가 조선학교 중학교를
H: 그러다가 고등학교 갔는데, 고등학교는 아예..
F: 안 갔어요? 갔다 오겠다고 하고?
H: 그렇지. 가방 메고 집에 나가면은 그때는 나고야 가면 친구들이 많았어. 전부 다 뭐랄까 名古屋駅裏이쪽에 전부 다 깡패들이 많았거든.
F: 그 친구들하고 사겼었군요.
H: 그때 친구들이랑 파칭코(パチンコ) 안그러면은 나이트 클럽.
F: 일본의 깡패들은 어떻게 불러요? 야쿠자(ヤクザ)?
H: 야쿠자처럼 된거지.
F: 야쿠자 친구들도 있었어요? 不良가 아니라?
H: 그니깐, 파칭코하고 나이트 클럽으로 나가는 거야.
F: 선생님도?
H: 파칭코에서 일하는데 안 나온다고 그러잖아. 그러면 끌어내가지고 가라 그러면 안 가면 그냥 두드려 패 버리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학교 가도 그렇고
F: 공부 가르쳐 주는 내용 그런 것들이 안 맞았어요?
H: 그때는 통 안 배웠어 내가. 그리고 일본 놈들이 얼마나 그때 당시에 갈취를 했어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호르몬야키(ホルモン焼き)를 파는 식당에서 일본 놈들 들어와서 ホルモン焼き먹으면서도 朝鮮人にんにく臭い라고 막.
F: 먹으면서도?
H: 그럼. 그니까 그런 놈들이니까 일본인하고 만나 싸운다 하면 그냥 안 죽도록 패는 거야. 근데 한국사람끼리는 잘 안 싸우지.
F: 야쿠자들은 다 동포들이었어요?
H: 거의 다. 일본 놈 없어.
F: 나이도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학교 다녀야 하는 나이?
H: 아니야. 나보다도 3살, 5살 많은 친구들이었어.
F: 그럼 兄さん들과 함께 배운 거세요? 그런 조금 무서운 일을?
H: 운동은 많이 했지.
F: 그러세요? 무슨 스포츠 하셨어요?
H: 검도하고, 유도하고.
F: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이 얘기는 다른 얘기인데, 검도 하신 분 중에 북송 하신 분 있잖아요. 일본에. 金田.검도라고 하시니까 잠깐 생각나서. 모르시죠?(知らないとうなずく)
H: 広島에서 온 친구가 일본에서 검도하던 친구 있어.
F: 북에 가신 친구중에? 広島에서? 싸움도 잘 하셨겠네요. 젊으셨을 때는 . H: 맞지는 않으니까. 동경에도 친구들 좀 있었고
F: 만나러 가거나 그랬어요? 그때 당시에 선생님 젊었을 때니까 잘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싸움을 잘 해야만 했었을까요?
H: 그때 왜냐면 일본 애들한테 안 맞을라면 자기는 자기가 지켜야 하니까.
F: 아무도 안 지켜주니까.
H: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때 일본 놈 6학년짜리를 패 버렸거든. 새끼를 전봇대 있으면 매 놓고 있다가 그 놈이 오면은 촥 걸어뿌면 넘어진단 말이야. 그럼 거 가서 패 버리고 그랬단 말이야. 그 왜 그렇냐면, 1학년 때인가? 일본학교를 간거야. 초등학교 때. 옆자리 여자애가 자꾸 건드린 거야 조센징 조센징 하면서 마늘 냄세 난다고. 우리야 그때 마늘 먹나? 안 먹지. 그 여자애를 팍 치니까 울고 그랬다고. 그니까 6학년 짜리가 내 동생 때렸다고 나를 때린 거야. 그래가지고 멍이 들어가지고 얼굴 퉁퉁 부었었어. 그 6학년짜리를 복수 하려고 저녁에 늦게 오는걸 알고, 한 동네 가까운 동네 있으니까, 새끼줄 가지고 계단에 오는 소리 듣고 감아가지고 딱 잡아당기니까 팍 넘어져 뿐거야. 가가지고 사정없이 패 버렸지. 그래가지고 그 새끼는 집에 가고 나는 도망쳐가지고 왔지. 그 다음날 그 6학년짜리 부모가 우리 집에 와가지고 아버지한테 당신 아들이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너 아들 어디 있냐고 막. 아버지가 보니까 저 덩치 큰 놈을 가지고 팼으니까 웃었다고. 웃으니까 일본 아버지가 화가 날거 아니에요? 난리 치니까 아버지 나보고 나오라고 했어. 가니까 둘다 초등학교짜리 요만 하거든. 그런 아한테 맞았으니까 6학년짜리 딱 잡고 집으로 데리고 가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 결국 일본 학교 뭐 그냥 안가.
F: 그렇게 투쟁을 하면서…
H: 아버지가 옛날에 또 유도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F: 아버님, 어머님은 어디서..남한 어디에서 오신거에요? 일본에?
H: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경상남도 진해.
F: 진해?
H: 응 진해.
F: 지금도 친척 분들이나 계시나요? 교류하거나 연락하거나 그래요?
H: 외갓집은 많지.
F: 외갓집도 경상남도?
H: 응 경상남도.
F: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H: 응
F: 그렇구나. 두 분 다 경남 출신.
H: 응 경남 출신
F: 마을 사람들?
H: 아니 아니 아니 일본에서 만나가지고.
F: 아, 일본에서 만나가지고.
H: 아버지는 이제 그 유학 온 사람이고.
F: 아 유학으로 오셨어요?
H: 응. 그 때 당시에 공부하러 일본에 왔고. 어머니는…
F: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가 일하러 오시거나 그런 거겠죠?
H: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됐어요.
F: 아이치에서?
H: (고개를 끄덕이다.)
F: 그렇군요.
H: 오카자키에서 외가가 큰 직조 공장을 했어.
F: 집게?
H: 직조.
F: 직조. 아 예. 외갓집이?
H: 응. 큰 공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일하는 사람이 한 150 명 정도 데리고 있었어. 그 쪽에서도 그 일본 사람들도 있고.
F: 지금도 있나요? 그 건 아세요? 지금도 그 회사는 있어요?
H: 없죠. 해방되고 싹 다 한국으로 갔으니까.
F: 아, 한국으로 가셨어요?
H: 외갓집은 전부 다 한국으로 왔어. 그 공장이고 뭐고 다 팔아가지고.
F: 아 예예예. 아 그래요. 아이고. 그거야 뭐… 그 이후에 6.25 때…
H: 아이 왜냐면은 해방되고 한국 사람들 잘 못하면 일본에서 맞아 죽는다. 그런 소문이 막 돌았다고.
F: 아 도망 가 듯이 돌아가셨구나. なるほど 그래서 이제 외갓집 분들이 다 여기 남한에…
H: 그렇죠. 외갓집은. 외가는 전부 다 한국 오고.
F: 그러면 그 때 당시 아주 어렸을 때겠지만 아는 분들이 남한에 계시거나 그래요?
H: 그 때는 외가 쪽이다 보니까…
F: 딱히 많이 교류는 없었고?
H: 응.
F: 아. 알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아버님은 진짜 혼자 오신 거네요?
H: 그렇죠. 유학. 공부하러.
F: 무슨 공부를?
H: 대학교.
F: 대학교에서 무슨 정공을 하셨어요?
H: 모르겠어요. 전공은 모르겠는데 메이지 대학교.
F: 메이지 대학교.
H: 응.
F: 그럼 아주 머리가 좋으셨겠네요.
H: 그럼.
F: 메이지 대학교 그 때 조선인이 들어가기가 참 어려웠을 텐데. 그러면 혼자 계셨다면 아버지의 가족 분들이 모두 남한에?
H: 그렇죠. 남한에 있고.
F: 남한에 계셨을 거 아니에요.
H: 그 때 당시에는 유학 공부 하려면 일본으로 유학 많이 갔잖아요.
F: 네 그렇죠. 그래야만 했겠죠.
H: 그니까 그 때 당시에 유학 간 거죠 일본으로.
F: 그리고서 학생 때 결혼을 하신 건가요? 아니면 졸업을 하시고 결혼하신 건지 그런 건 모르시나?
H: 그런 건 확실이는 모르겠는데. 그 때 학교 다니면서 아마 결혼을 한 것 같애.
F: 아 그렇군요. 졸업을 한 뒤에 무슨 활동 하셨나요? 무슨 대학교까지 나오시고 머리고 좋으시니까.
H: 아 그 때 보통 뭐랄까.
F: 정치 활동을 하셨나?
H: 비행장 지을 적에 그 공사를 아버지가 하고 그랬어요.
F: 아 그런 회사를 아예 만드시거나, 창립을 하신 건가요?
H: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건축 계통에는 좀 거하지. 나중에는 이제 아버지가 일본의 전기 공사 그게.
F: 전기선 그런 거를 개통해주고.
H: 예 지하로 묻는 그 케이블. 케이블 공사 같은 걸 했지.
F: 그게 진짜 기술인데. 그죠?
H: 그거는 일꾼들 한 200명 데리고 다니면서 전국적으로 공사를 하니까.
F:그렇죠. 아 그게 한 50년대 조선인 그러니까 한반도가 전쟁 일어나면서 일본인 경제가 약간 조금 안정 되잖아요. 그러면서 전기가 다 그냥 생기고 그랬다고 들었는데…
H: 그니까 일본도 우리나라 6.25 사변 나는 바람에 조금 일어나고 그랬지.
F: 그렇죠. 그렇죠. 되게 아이러니 하지만. 그때 그러면 50년대 초반 그 쯤에 그렇게 하셨군요?
H: 아 그러니까 50, 55년도인가 6년도 이때부터 공자 시작했지
F: 그러니까 비행기 그 뭐야 하시고서
H: 그러니까 왜 그러냐 하면 아버지가 메이지 대학교 다니면서 그 동창들이 일본 요직에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 친구들한테 해서 내가 한 번 하다 하니까 준 거지. 하게끔.
F: 아 なるほど 그렇군요. 대학교를 가면 일본에 그 쪽 친구들도 생기고 그렇겠네요.
H: 그러니까 한국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그 공사를 할 수가 없는 입장이라고. 왜냐면 케이블 공사는 외국인을 안 맺기거든. 근데 아버지는 그걸 했어.
F: 음 그죠. 믿음이 있어서 그렇겠네요. 안 그래도 그냥 그 학위도 있고. 기술력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H: 그건 인자, 전에는 케이블을 전부 다 지상으로 이렇게 케이블을 했는데 나중에 이제 지하로 다 하니까 이제 그 공사를. 그렇게 한 군데 가면은 일년 이년 씩 이렇게 있어. 그 공사 마치려면.
F: 그러면 선생님도 같이 하거나 도와드리거나 했어요?
H: 그렇지, 가서.
F: 선생님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막 야쿠자 일도 하면서도, 뭐 아버님께서 도와달라 할 때는 도와드리고?
H: 내가 아버지 도와드린 것은 고등학교 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그 때 이제 북송선 어짜고 말이 많았었다고.
F: 그렇겠네요.
H: 왜 그러냐면, 59년도 북송 1차 북송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북으로 가야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알았습니다 했는데, 주위에 인자 민단에 있는 사람들이 너 거기 가면 안된다 그래가지고 NO 했어. 왜 그러냐면 어머니도, 어머니는 또 민단계야.
F: 아 민단에서 그 쪽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그러셨어요?
H: 어. 어머니는 민단계고 아버지는 조총련이고.
F: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있겠는데, 그건 왜요? 국적 때문이에요? 어머니께서 한국 국적을 따시거나 그러셨어요?
H: 그렇죠. 한국에 전부 다 그 부모들이 다 있으니까. 형제 간이고 부모가.
F: 아 그러면 그 당시에 한국 국적을 선택을 하셨군요.
H: 그러니까 渡航証明書 받을 적에 당시엔 어디냐 그럴 적엔 조선이라 그랬으면 조총련 됐을 텐데 한국이라 그러니까 한국을 받은 거지. 민단 한국 그런 사람들은 민단.
F: 그런데 신기해요. 아 죄송해요. 부부끼리 예를 들어 부부가 결혼을 할 때 이미 한국 국적이나 조총련…
H: 그 때는 渡航証明書가 없었어.
F: 아 네. 부부기리 같이 도로쿠(登録) 할 때 그 渡航証明書 할 때 같이 같은 데를 고르는 경우가 많은데 두분이 그러지 않으셨으니까.
H: 그 때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불러 가지고 당신 국적이 어디냐 어디냐
F: 아 개인적으로 불렀었어요?
H: 그렇지.
F: 아 그래서 부부가 따로따로 선택을 하시고. 민단 쪽에 어머니께서 어울리시고서
H: 그니까 渡航証明書 받을 적에 벌써 조선이라 그랬으면 조선 찍어 버리고, 난 한국이요 그러면 한국 찍고.
F: 자연스러 선생님께서는 그니까 H 선생님은 아버지 쪽, 朝鮮가 되는 거네요.
H: 그렇죠 아버지 쪽이니까. 호적으로 봤을 때 아버지 쪽이니까 조선이 되어버린 거라고. 오사카 이 쪽에도 다 그렇게 된 거예요. 당연하지 전부 다 옛날엔 다 조선이라고 그랬지 한국이라고 잘 안 그랬다고.
F: 네 한국이라고 사람들이 잘 몰랐고 조센징 조센징이라고 사람들이 하고 조센징 스스로도 조센징이라고 그랬죠.
H: 그러니까 전부 다 조선이 돼 뿐 거야. 거기 전부다 조총련이 돼 뿐 거야.
F: 근데 뭐 그렇게 생각을 한 사람들은 한국을 선택하고. 어머니께서 그러셨군요. 근 그당시에 민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은데.
H: 많지 않았어.
F: 욕도 많이 먹었을 거고. 그죠?
H: 그러니까 민단은 약했어요. 그 때는.
F: 그렇죠 그 때는 힘도 없고. 아이고 그러셨구나. 그러면 집에서도 집싸움도 되게 많았겠네요.
H: 네?
F: 집에서 부부 싸움이.
H: 부부 싸움은 안 했어요.
F: 그런 건 안 했어요?
H: 그런 건 안해.
F: 정치적인 거랑 그런 거로 싸우거나 그러지는 않으셨군요. 근데 아들 입장에서는 걱정됐겠네요. 왜냐면은 국가끼리 전쟁하는데 그죠?
H: 그니까 뭐 사상이 그렇다 뿐이니까 부부 간에는 싸우거나 그러지는 않아.
F: 그렇군요. 그 때 뭐 예를 들어 두분 다 민단 하면 좋으실 텐데 라던가 그런 생각은 안 하셨어요? 선생님?
H: 그 정도로 생각 안 했어요. 나중에 북송되기 전에는 나 이북에 안 간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공사하면서 그러면 넌 내 자식이 아니다.
F: 아이고.
H: 이렇게 돼 뿐 거야. 그 소리 듣고 집에서 튀어 나갔지.
F: 고등학교 졸업을 하신 게 오십 칠팔 년 그 정도시겠죠? 그리고 바로 61년도에 가셨다고 하니까 그 삼 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 볼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님 일도 도와드리고 그렇게?
H: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은, 아버지 일 도와드릴 때 이제, 그 때 당시 거류 민단의 어데고 나는 이제 이야기 들었으니까 이북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나 이북 안 간다 이렇게 된 거고. 아버지는 조총련 본부에서 명령이 떨어진 거예요.
F: 본부에서 활동 하셨어요?
H: 응?
F: 조총련 본부에서
H: 응 조총련 본부에서 왜 그러냐면.
F: 지역이 아니라 본부에서?
H: 북송. 쭉 북송 되는데, 왜 간부들 자식들은 왜 북송이 안 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F: 예,
H: 그래서 60년도에 아버지가 되게 쫀 거지 나를.
F: 제발 좀 다녀 오라.
H: 저 딴 사람 다 갈라 그러는데 니는 왜 안 갈라 그러냐. 안 간다고. 어머니도 여기 있는데 뭐 할라고 안 간다고 그랬거든.
F: 가족들이 계시니까.
H: 그러니까 저 뭐야.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래가지고, 좋다 그러면 난 나가겠다. 그래가지고 그 때부터 나고야 와가지고 친구들하고 뭐.
F: 아 야쿠자 친구들이랑?
H: 거기서 이제, 전에도 있었지만도, 그 후로 거기 가가지고 계속 거기 있었지.
F: 예.
H: 있는데. 그 때 60년도 후반에 아버지가 찾아 왔어요. 나고야에.
F: 어머 나고야에? 나이토크라부에?
H: 아니
F: 아 거기 숙소 지내는 데서?
H: 예. 거기 와가지고 찾아 와가지고, 뭐 이북 안 가도 좋으니까 집에 오라. 그래서 알겠다고, 내 그거 한 대로 여기 정리 하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러고 60년 말일 정도 돼서 집에 들어간 거지. 그래가지고 아버지 일 도와주고. 근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무리 부모가 나쁘더라도 부모가 나쁜 데를 보내겠느냐 그런 맘이 들은 거야. 나쁘면 왜 부모가 자식을 보내겠냐. 근데 들어보니까 조총련 부모 간부들 부모들이 굉장히 고심을 한 거야. 중앙당에서 막 내려오니까. 그래서 내가 내가 복수를 하겠다고 내가 가서 신청했다니까.
F: 아 직접 가셔서?
H: 응 아버지가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가서 신청했다니까.
F: 아 그 마지막은 H 선생님께서 선택을 하신 거네.
H: 응 61년도에 내가 가서 신청을 했어요. 아버지는 모르지. 근데 내가 가서 신청을 하고 이제 집에 오니까 아버지가 그 소식을 어떻게 듣고서 그냥, 이야 과연 “니는 내 자식이다.”
F: 아 그렇게 인정을 해주시니까 그 때는 아들 노릇이라고 할까요?
H: 그래가지고 61년도 6월달 북송된 거지 62차.
F: 아 그렇구나. 그런데 설마 부모가 그런 나쁜 곳에 아들을 보내겠느냐 라는 생각도 하셨다고 하시는데 아버님도 그렇고 조총련의 간부들은 북의 그런 상황들을?
H: 몰라. 모르지.
F: 진짜 낙원이라고 믿었을 까요?
H: 그럼
F: 괜찮은 나라라고.
H: 근데 내가 출발할 적에 우리 오카자키 지부의 간부들도 같이 북송했거든. 그러니까 조총련 거기서 십 몇 년 씩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사람이거든. 식구들을 다 데리고. 나도 그 때 같이 갔어요. 북송. 근데 가가지고 배치하기 전에 벌써 청진항에 도착해가지고 초대소에서 간부들이 하는 얘기가, “잘 못했다”고. 이렇게 나쁜 줄 몰랐다고.
F: 선생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60년도 쯤에는 이미 그 소문들이 있었잖아요 미리 간 사람들 59년에 간 사람들의 소문들. 그러니까 물건 보내달라고 하거나 그랬다던가.
H: 그렇지
F: 그건 선생님도 아셨을 거고. 민단의 어머니를 통해 그런 것도 잘 아셨을 거 아니에요?
H: 그러니까 그게 잘 못된 거라고. 왜냐하면 저 일본에서 이렇게 생활하다가 가니까 일도 잘 안하고, 일본에서 일도 잘 안하고 먹고 노는 사람도 많았었거든 일본에서도. 그니까 그런 사람들이 그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하는 얘기로 해가지고 소문이 난 거야. 아무 것도 아니다.
F: 그런 소문이…응.
H: 그니까 설탕 보내달라, 뭐 라멘 보내달라.
F: 아 거기 가서도 놀고 있는 거겠다고?
H: 네 그러니까…
F: 그러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말라?
H: 응 그러니까 뭐 라면, 설탕 이런 거 보내달라고 그랬거든. 그 다음에 두꺼운 옷 이런 거 보내달라 뭐. 근데 그런 편지가 오고 그랬는데, 한 동안 오다가 딱 끊어졌어. 왜냐면 북에서 편지 가는 것을 Cut해버렸어. 그리고 내가 이북 가니까 그걸 얘기하더라. 나도 집에 편지를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딱 두 통 간 거야, 어머니한테 물어보니까.
F: 대략 얼마나 보냈는지 기억하세요? 많이 보냈다고 하시는 건?
H: 한 백 통 이상 보냈지.
F: 백 통? 백 중에 두 통만 갔어요?
H: 그 다음에 이제 친구들한테 나고야, 갈 적에 서로 묻고 약속을 했거든. 검은 펜으로 하면은 나쁘고, 파란 펜으로 써가지고, 편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까만 펜으로 한 거는 나쁘다. 아니다. 그리고 파란 펜으로 하면은 좋은 걸로 알아라 해가지고, 약속을 해가지고 편지를 일본에 보냈거든. 그 편지는 일본에서 다 받아 본 거야.
F: 어땠어요? 색깔이?
H: 파란 잉크로 편지 해 쓴 거는 다 온 거야 일본에. 그 왜 그러냐면 이북에 굉장히 좋고 살기 좋으니까 너 딸 결혼식 해서 사위하고 데리고 다 북송해서 오라. 이런 말을 쓴거야 거기다가. 그니까 얼마나 좋은 편지요 북에서 봤을 때. 근데 내 친구는 딸이 그 때 두 살인가 밖에 안 됐었거든. 생각해 봐요. 딸 두 살짜리 저 시집 보내가지고 사위하고 오라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하는 거랑 같은 말이거든.
F: 아 예. 근데 그 편지도 있었는데도 선생님께서는 그 편지를 언제 받은 거예요?
H: 누구?
F: 그니까 그 편지는 언제?
H: 누구? 나요?
F: 네.
H: 내가 받은 게 아니고.
F: 아 아는 분이?
H: 내가 보낸 편지가 일본에 나중에 알아보니까. 내가 일본으로 편지를 보낸 거는 친구한테 편지가 도착해가지고.
F: 네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선생님 북에 간다고 결정을 하셨을 때, 어머니께서는 완전히 반대를 하셨겠네요?
H: 반대했지. 그 때는 어머니가 따로 살았어 아버지하고.
F: 아 이제야 떨어져서.
H: 음… 뭐라고 할까, 좀 아버지하고 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어머니는 그냥 나고야 쪽에 와버리고. 아버지는 오카자키니까 또 공사를 여러 군데 다니기 때문에. 그래서 어머니하고 이제 잘 안 만나지고, 나중에 이제 북송할 적에 나고야역에서 어머니를 만난 거야. 가지 말라고 그러는데 왜 가느냐, 뭐 아버지가 저러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 뭐 3년 후에는,
F: 뭐 왕래가 가능하다고들 하니까…
H: 그래서 이제 나고야에서 헤어지고.
F: 되게 선생님께서 대단한 결정을 하셨다고, 그러니까 가기 싫다고 원래는 했었는데 그렇게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뭐 아버님의 아들 버릇(노릇)이라던가 그런 거를 생각하신 거는 이해하는데, 왜 그걸… 또 다른 계기는 없었어요? 예를 들어 다른 조금 삶이, 야쿠자 하는 것도 지쳤으니까 가볼까 라던가? 그런 건 없었어요?
H: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가가지고, 만일 가면 탈출한다는 계획이 있었어요.
F: 아 원래 있었어요?
H: 네 만일 가가지고 나쁘면은 탈출한다는 그런 결심 하에, 가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간 거야.
F: 아 그렇군요. 와…
H: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좋다는 나라가 도대체 어떠한 나라인지
F: 그것도 조금 궁금하셨군요? 그때 선생님 그래도 조선학교를 다니셨다고는 했지만 졸업하셨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학교를 많이 안 다니셨다고 했잖아요?
H: 안 다녔지.
F: 그러면 우리말은 어땠어요? 조선어.
H: 그러니까 원해 우리 집에서는 일본말 별로 안 썼어요. 한국어로 쓰고, 어머니도 한국어로.
F: 아 그렇구나. 하긴 뭐 그쵸. 아버님 회사 아버님께서 운영을 하신다면 일본인과 소통할 때는 일본어 쓰시면서 집에서는 편히 우리말 쓰시고 그러시고.
H: 그렇지. 그러니까 아버지가 사상이 아주 완전한 사상이 완전 조총련.
F: 영향을 받고 완전 김일성을 위해 나라 건립 무슨 투쟁하겠다?
H: 응 기부도 많이 하고
F: 그 때 번 돈들을?
H: 그니까 내가 백 만엔 벌었다고 하면 10프로면 10프로 20프로면 20프로를 기부하고 그러잖아? 조총련들은 다 그랬다고. 내가 빠칭고 해서 벌은 돈 10프로면 10프로 20프로면 20프로 다 종총련 거기다가 보내고 그랬거든.
F: 그럼 조총련에서 열심히 열심히 애타게 활동하시는 아버님 보고 선생님은 어떻게 느끼셨어요 ?
H: 그냥 별로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지.
F: 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들에게 그냥 북에 가라고 했을 때는 처음에는 화가 났을 것 같아서, 어땠을까요?
H: 그니까 처음보다도, 자꾸 강요하니까, 싫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아버지도
F: 뭐 그럼 나가라 이렇게?
H: 그 때는 아들이 나 하나 밖에 없었거든.
F: 아 그래요?
H: 동생이 내 밑으로 세 명이 다 죽었어. 홍역 여기 뭐 다 심해가지고. 그 때 일본에서도 홍역이 많이 심했잖아요. 그 전쟁 끝나고 난 뒤에 그 홍역들이 굉장히 많았거든. 그래가지고 아들이 나 혼자 있는데, 그 다음에 북송할 적에 동생이 하나 생겼어. 그 61년도 4월달에 태어났지. 그러니까 내가 갈 무렵에 4월달에 태어난 거지.
F: 잠깐 보다가 이제 헤어지게 된 거네요? 그냥 또 들어올 수도 있고 뭐, 아버지가 말하는 그런 조국이라는 게 어떤 건지 경험 삼아 봐 볼까 해서 가셨군요.
H: 그러니까 그 가볼까 그냥 보다도 학교 문제도 있었거든, 내가 학교를 전혀 못 다녔으니까. 아버지가 너 거기 가면 김일성 대학까지 갈 수 있으니까. 공부하라. 근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김일성 대학이 아니라, 엄두도 못 내, 재일교포는 김일성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 했어요.
F: 그래요.
H: 아무렴 전혀. 1,2차인가 몇 차는 평양에 거주하게끔 했는데, 그 이후로는 전부 다 지방으로 다 분산 시켰잖아.
F: 좀만 더 여쭈어 볼게요. 그 아버님은 안 가셨는데, 갈 생각은 하셨어요? 나중에?
H: 아니요. 나중에. 그 공사가 끝나고 이북으로 오기로, 그게 한 62년도 쯤 되면 공사 끝나거든. 공사 끝나면은 오기로 하고.
F: 아 그래서 먼저 가있으라, 나중에 갈테니까 그렇게?
H: 잘 됐지 뭐, 그렇게 일본에서 차라리 돌아가신 게 잘 된 거지. 그것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F: 언제 돌아가셨어요?
H: 음 그러니까 61년 7월달에 나 보내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셨어. 저 뭐야 공사, 공사장에 비가 많이 오니까 공사하는데 그걸 보러 나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근데 그걸 몰랐는데 오카자키에서 온 사람이,
F: 아는 분이? 아버님 아는 분이?
H: 아니 우리는 다 알지. 그니까 그 인편에 그 옷이니 뭐니 이런 걸 못 가져갔으니까 그 인편에 보내주겠다고 그랬어. 그래서 이제 청진에 가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원래 별명이 콩나물 아지매라 그랬거든 콩나물 아지매가 왔는데,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버지가 얼마 만에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때 이제 얘기 들었지.
F: 콩나물아지매가 전해줬군요. 아이고.
H: 그 다음부턴 뭐, 그 다음엔 이제 완전히 이제 탈출 계획을 제대로 세운 거지.
F: 이제 생활도 굳이 좋은 건 아니었고, 아버님도 이제 뒤에 안 오신다는 것을 알겠으니까. 혼자 계시는 거니까 이제, 이런 춥고 뭐 먹을 것도 막 그렇게 좋지 않은 나라에서. 뭐 무슨 북에 가셔서 처음에 배에서 보이는 사람들 풍경도 그렇겠지만 뭔가 기억하는 냄새라던가 기억하는 날씨라던가 그런 게 있어요?
H: 날씨는 되게 추워.
F: 되게 추웠어요? 선생님이 가신 때가 그래도 6월달이니까 그 때는
H: 그 때는 춥지는 않은데, 저녁 되면은
F: 아 쌀쌀하고?
H: 저녁엔 이불 안 덮고 자면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웠어요.
F: 아 그렇구나. 그 만큼 추운 거네. 그렇죠 위도가 그러니까.
H: 함경북도 쪽에는 저녁 되면 추워.
F: 아 함경북도 쪽에 배치된 거세요? 함경북도 어디에?
H: 웅기라는 데 있잖아요. 웅기라는 데가 지금 선봉.
F: 그러시구나.
H: 거기 영하 25도 이상 떨어져. 굉장히 추워.
F: 배에서 내릴 때 쯤에 냄새는 어때요? 냄새. 기억나는 게 있어요?
H: 냄새 뭐 뭐랄까, 굉장히 뭐 맡지 못할 그런 냄새. 그리고 환영하러 나온 저 처녀들이 얼굴이 전부다 뭐랄까?
F: 까맸어요?
H: 까만 거이 아니라
F: 때가 있거나
H: 버짐이 피듯이 얼굴이 형편이 없어 화장했다는 기, 화장이 제대로 안되고, 누래가지고, 그니까 그 영양을 못 먹고 하니까.
F: 아이고 그렇구나. 선생님 그렇게 충격적인 그런 이주, 이동을 하고서 바로 그 다음에 아버님의 그런 소식도 듣고 굉장히 가슴, 정신적으로 힘드셨을 것 같아요.
H: 그럼, 그래서 이제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가가지고, 못 오게끔 해야겠다고 그냥 결심한 거예요.
F: 그래도 뭐 매월 배가 또 도착해가지고
H: 막 북송돼 오니까 그걸 막아야겠다 그래가지고.
F: 예, 그러면 그렇게 결심을 도착하자마자 하셨겠지만, 배치 받고 일단 어떻게 지내셨어요 거기서는?
H: 거기 공장에
F: 공장에서? 무슨 공장?
H: 공장이 그 종합 기계 공장이라고 그러지. 웅기의 종합 기계 공장.
F: 거기에 저기 뭐 평양 배치 못 받았던 것도 그렇겠지만 대학을 가고 싶다는 그런 거는
H: 신청했는데
F: 네 아예 못 받아들여졌어요? 안타깝네요.
H: 그래가지고 함경북도 웅기라고 배치 당했는데 거기도 김일성 대학이 있는가 보다 생각했지. 근데 없어요. 공장에 가고. 혼자 갔으니까 나는 또 합숙소.
F: 합서소?
H: 합숙소라고 공장합숙소.
F: 아 혼자 계시니까 가족들이 안 계시니까 그런가요?
H: 응
F: 거기서 일을 하라?
H: 거기서 이제 단체로 생활하라.
F: 아 합숙생활을 하셨구나. 그래도 선생님께서 함경북도라면 탈출하기에는
H: 아이고 멀지.
F: 아 멀긴 먼데, 그래도 평양 이런 데 보다는 국경이
H: 아니야
F: 그렇게 차이가 안 나요?
H: 제일 꼭대기니까 우리나라 지도에서 제일 끄트머리예요. 웅기가. 거기서 38선까지 올라면은 엄청나게 멀지. 거기다가 표를
F: 아 38까지 내려가셨구나 죄송해요 제가 헷갈렸어요. 많은 분들이 중국을 거쳐서 탈북을 하니까
H: 그거는 지금 온 사람들은 중국으로 해서 탈북하지만도 나는 38선으로 해서 넘어왔어.
F: 이해했어요. 그거야 되게 먼 길을 가셨네요. 얘기가 다시 돌아가는데,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경력이나 경험이 있어서 그러셨어요?
H: 아니 그것 보다도 차 운전을 할 줄 아니까, 종합 기계 공장 안에도 자동차 수리하는 데가 있어요. 거기 배치가 된 거지.
F: 주변 사람들도 그랬어요? 하고 싶은 업무나 이제까지 경력이나, 아니면 대학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계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역시
H: 보내주지 않아. 근데 일본에서 특이한 사람의 자식이 같으면은 몰라도
F: 뭐 어떤 사람들이에요? 총련 간부라던가?
H: 그렇지.
F: 기부액이?
H: 기부 많이 한 사람도 있고
F: 그럼 선생님 집안도 그렇게 치면 완전히
H: 그러니까 간부의 자식이니까 보내줄 줄 알았는데 안 돼.
F: 그게 왜였을까요? 안 그래도 총련 계열의 가족인데,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었군요. 무슨 차이가 나지?
H: 그니까 일본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할 수 없다. 이렇게 된 거야.
F: 그렇게 높은 자리로 가면 안 된다 이렇게
H: 그러니까 재일교포 중에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뭐 다섯 손가락 안에 밖에 없으니까. 내가 알기는.
F: 근데 많은 분들이 대학을 갈 수 있다라고 그런 선전더 있고.
H: 그렇지 일본에서야 지상 낙원이고 학교는, 대학교는 저 뭐고 김일성 종합대학도 갈 수 있고, 다 보내준다 이랬거든. 근데 가면 누구 마음대로 보내주니. 절대 안 보내 줘.
F: 그 때 감정이 어땠어요?
H: 그러니까 전부 다 속았다는 얘기지.
F: 속았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된거죠?
H: 알게 된 거지. 이제 그 배치 받고 웅기에 가게 되니까 알게 된 거야.
F: 아 웅기에 가게 돼서 알게 된 거예요.
H: 그죠. 왜냐. 배치를 걸로 했기 때문에 거기에도 김일성 대학이 있지 않겠느냐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거든 공장을 보내니까. 만일 대학교 보낸다면 왜 공장을 보내겠어. 웅기에 가니까 교포들도 많이 와 있더라고.
F: 어떤 사람들이 계셨어요? 히로시마에서 방금
H: 응 히로시마에서 온 친구도 있고, 여러 군데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요.
F: 그 중에 인상 깊었던 말이라든가 대화 그런 건 있어요?
H: 대화는 전부 다 그냥 일본말로 대화하지. 왜 그러냐면은
F: 알아 들으니까?
H: 응 알아 들으니까 못 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
F: 못 알아 듣게 일본어로? 사람들이 어땠어요?
H: 그러니까 그냥 뭐랄까 일본말도 제대로 못 알아 들을 뿐더러 일본말은 일본에서 보통 쓰던 말이니까 그냥 편안하니까 그냥 일본말로 하는 거지.
F: 일본 그런데 대화를 하면 걸리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그때?
H: 될 수 있으면 하지 말라고 그러지.
F: 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H: 응 같이 공장에서 재일교포들도 있는데, 만나면 뭐 일본말 하고 뭐.
F: 네네 같이 술잔 기울이거나 그럴 때?
H: 근데 술 먹으러, 식당에 가서 술 먹을 때도 전부다 일본말 하지.
F: 뭐 어땠어요 그때는? 조금 마음도 덜 먹고?
H: 아 술 먹고 이러면, 저녁에는 일 끝나고 난 뒤에 일인당 2홉 씩 배급을 줬어 술을. 식당에 가면은 2홉 씩 배급을 줘요 일인당.
F: 술도? 그걸 마시겠네요.
H: 근데 이제 그 때도 이 와이로(賄賂)가 있었어요.
F: 어떻게요?
H: 그러니까 일본에는, 아니 이북에는 비누가 없어. 근데 이제 나는 독실 갈 적에 니가타에서 빨래 비누를 박스로, 한 박스가 백장 들어있거든. 한 박스니 가루 비누 이런 거 세숫비누, 뭐 치약 이런 거를 이제 거기 가서 사느니 이게 사가지고 간다 해가지고 다 해가지고 갖고 갔는데.
F: 그게 잘 사용이 됐어요?
H: 그게 돈이 되는 거야. 빨래 비누 같은 게. 그래 빨래 비누를, 이 만 하잖아. 이 만 한 거. 그거를 네 토막을 내. 네 토막을 해가지고 한 토막을 그 지배인이라고 그 사람한테 와이로 주는 거야. 주면은 술을 얼마든지 주는 거야. 그러니까 막 일본 생각나고, 막 화도 나고 그러니까 술로 그냥 보내는 거지 뭐. 저녁에는. 그래가지고 그냥 일본 노래도 부르고. 그러면 거기에 있는 주민들이 일본 노래 부르니까 막 난리 되고 그러거든.
F: 어 그거 좋다 이렇게?
H: 그니까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 중에서도 말하자면 반동 분자가 있는 거야. 재일 교포 중에서도. 거 고국에 까지 와서 말이지 일본 노래 부르면 되겠느냐고. 그런 말 하니까 그게 이제 시비가 붙어가지고 싸우게 되는 거야.
F: 선생님께서 그러면 이북에 가신 후에도 조금 싸우고 그러셨군요. 특히 누구랑 싸우셨어요? 재일동포끼리?
H: 응 재일동포 그 놈하고도 싸우고. 고 다음에 내무서원, 내무서원이라고 하면 경찰관이지. 경찰관 두고 패버렸으니까 생각해 봐요. 어떻게 됐는가. 난리 난 거지. 다섯 명이, 교포 다섯 명이 술 먹다가 그렇게 되니까 뭐 난리 난 거지.
F: 큰 사건이겠네요. 그 지역에서는.
H: 그래가지고 동지 재판까지 걸렸으니까. 동지 재판, 그러니까 공장의 동지 재판.
F: 어떻게 됐어요?
H: 징역을 보내야 된다 막 이렇게 됐어. 근데 공장 당 위원장이란 사람이 우리가 교육을 잘 못 했으니까 이번 한번 만큼은 용서해 주자고. 그래가지고 용서 받은 거야 그때.
F: 아 귀국한지 얼마 안 됐을 거고, 사상적으로 아직 부족하다?
H: 그 때 8월 추석 때니까
F: 선생님 사상 교육 그런 것은 받으셨어요?
H: 네?
F: 사상교육? 도착해서 사상에 관한 것.
H: 그런 건 뭐 전혀 생각을 안 하니까. 원래 뭐 사상이라는 게 어쩧고 저쩧고 하는 것은 우리 젊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안 들어갔으니까.
F: 뭐 그냥 거기 매일 공장에서 일하는 거고, 아침에 그러한 교육을 하는 시간, 그런 것도 그 때는 딱히 없었던 건가요?
H: 이북에서?
F: 네.
H: 있죠. 아침에 공장 출근 하면은 교육을 시키잖아요. 20분이고 30분이고 교육하고. 이제 일하고 난 뒤에 퇴근하기 전에 또 교육 있고.
F: 선생님은 그 시간이 어땠어요? 싫었겠네요.
H: 그 뭐 안 가면 안 되니까.
F: 어쩔 수 없이 가는데.
H: 그리고 이북 가서도 뭐 공장이 별로 일 안 했어요. 이제 어떻게 하냐면은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나를 찾을 거 아니에요? 그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청진이고 원산이고 평양이고 막 왔다 갔다 하는 거에요.
F: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런 업무가 있었어요? 운전으로?
H: 아뇨. 돈이 있으니까. 그 때는 재일교포를 그렇게 막지를 않았으니까. 자유를 줬으니까. 재일교포는. 근데 전 표를 평양까지는 끊을 수가 없어. 청진이면 청진. 평양까지 갈려면 한 몇 번 갈아타고 가야 돼. 그러니까 평양까지 가려면, 웅기에서 평양까지 가려면 삼사일 걸려서 평양에 들어간다고.
F: 잠깐만요. 그러면 공장에서 그냥 업무 하는 날에 땡땡이 친거예요?
H: 그렇지 일 안 나가고
F: 돈도 있으니까 그냥 돌아다니고?
H: 그 때 당시에 시계 하나 팔면 이북 돈으로 400원 받았거든, 400원이면 굉장히 큰 돈이야. 왜냐하면 내 봉급이 40원이 안 됐으니까 한달에. 근데 400원이면 엄청난 거 아냐. 몇 가지만 팔면 한 돈 천 원 만드는 거야. 그래가지고 그 돈 가지고 가는 거예요.
F: 전철 타고?
H: 기차 아니 열차 타고. 청진 가가지고 거기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 날에 또 저 원산, 원산까지 가고, 원산에서 또 평양 들어가고.
F: 여행이네요 완전히.
H: 그렇죠. 뭐 여행이라기 보다도, 이북이 전체가 웅기처럼 형편이 없는가 하고 그거를 한 번 다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야 탈출하더라도 평양이 어떻고, 원산 가니까 원산이 어떻다. 청진은 어땠으며 이런 걸 이야기 해 줘야 되잖아. 그것도 그렇고 도 갑자기 내가 없어지면 막 찾고 그러니까 그러고 갔다 와서는 한 일주일 또 일 하거든. 그러고 또 얼마 안 되면 또 없어지고. 이거를 반복한 거야. 그러니까 나 없어지면 저거 돈 떨어지면 또 올 것이다.
F: 어디 간 거다. 뭐 귀국자니까 그냥 둬. 오면은 또 일 열심히 하는 놈이잖아 막 그렇게 인상을 만드신 거네요.
H: 그리고 하루만 일 안 하면은 배급을 안 줬어요. 한 달 배급을, 아니 그러니까 보름 배급.
F: 선생님 탈북을 원래, 탈북할 계획으로 가셨고, 만약에 괜찮은 나라라면 계속 있을 생각도 있으셨어요? 거기서 살만하다, 가족이 생기거나 그러면
H: 그렇죠
F: 근데 벌써부터 여기는 떠나야 된다 라는 것을 결정하시고서
H: 딱 일본에서 출발할 적에 만약에 아니면 탈출한다 하는 걸 계획했고, 그 다음에 청진에 딱 도착을 하니까 아 이게 아니다, 속았다, 하는 것을 마음 먹고, 그 때부터 이제 탈출 계획을 한 거라고.
F: 근데 그런 계획을 누군가 재일동포인 친구라던가 같이 북송한, 얘기를 해 본적이 있어요?
H: 그럼.
F: 어땠어요 반응이?
H: 자기들도 가겠다 그러는, 근데, 근데 식구들이 있어가지고
F: 예 그렇죠 쉽게…
H: 식구들이 있어가지고 탈출 못 하네. 독신 같으면 모르겠는데.
F: 혼자 선생님처럼 오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죠 어렵네요. 일본에 가고 싶으나 식구와 떨어져서 사는 거랑 무슨 인생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 라는 거죠.
H: 그 참에는 그래.
F: 그렇구나. 얘기 하고서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H: 그런 건 없어. 만약에 성공하면은 일본에 가가지고 일본 가면 조총련들 다 때려 뿐다고 그랬으니까. 내가 그랬거든. 만일 내가 살아서 일본에 가면은 조총련들 싹 정리를 한다고 그랬거든.
F: 그랬더니 어땠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H: 그렇지. 하나도 빠짐 없이 이야기해 달라고. 왜냐면 그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은 뭐 괜찮은데, 여 한 세 네 살 이런 애들 조그만 애들, 일본에서 그렇게 먹던 애들이 라멘 먹고 싶으니까 라멘 달라고 그라고 과자 달라고 그라고, 부모가 그 이야기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퍼.
F: 가슴이 찢어질 것 같네요. 부모의 선택으로 왔는데.
H: 그래서 그걸 알기 때문에 일본 가면은 그 이야기를 할라고.
F: 정말 무거운 짐을 들고 선생님은 탈북하셨군요. 사람들의 그런 분노와 소원
H: 그렇지
F: 그러셨구나. 그렇게 돌아다니시고 공장에서 잠깐 일을 하고서 그런 식으로 지내셔서.
H: 근데 일본에서 저 뭐야 그거를, 비자를 안 내줬어요.
F: 아 뭐 그렇겠죠. 좀 이따가 일본의 얘기를 좀 여쭈어 볼게요.
H: 왜냐면… 응?
F: 좀만 북에서 지내셨을 때 얘기를 조금 듣고 싶어서. 나중에 일본의 비자를 안 주셨던 얘기 좀 들어 볼게요. 저기 북에 계셨을 때 겐짱? 현지 분들이랑 지내거나 친구 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H: 없어요.
F: 아예 없었어요? 뭐 그래도 공장에서 지도해주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은 현지인? 그것도 다 귀국자였어요?
H: 다 귀국자. 걔들은 겐짱이란 얘기는 나중에 좋은 말이고, 원래는 아파치라고 그랬어 아파치. 인디언 영화 보면 아파치 나오잖아? 그런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파치라고 그런 거야. 겐짱이 아니라 아파치.
F: 아 겐짱은 나중에 나온 말이에요? 아 저 배웠어요.
H: 아파치라는 말? 오사카에도 그 탈북해 온 사람들 많을 걸 아마.
F: 예. 오사카 분들이 다 겐짱 겐짱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H: 겐짱이 아니라 아파치.
F: 아파치라고 했구나. 근데 전혀 그렇게 깊게 대화를 하거나 그런 적은 아예 없으셨군요.
H: 만약 걔들한테 얘기 하면 거기에 바로 그거 드가는데
F: 예. 왜 들어가요?
H: 내무성이니 어디에 고발되니까 그거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저 뭐꼬 겐장한테는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 우리 교포들은 다 그기니까.
F: 알겠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요 그러면 평양이나 청진 이런 데를 다니셨다고 하던데 북에서 좋았던 거는 있어요? 음식이 맛있었다던가, 아니면은 사람이 좋았다던가, 평양의 풍경이라던가,
H: 없어요.
F: 그 순간 한 번도 없었어요?
H: 없어요. 왜냐면 음식도 음식이지만도 벌써 사람들이 맘에 안 드니까. 북한 사람 북한 사람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들었어.
F: 어 그건 왜요? 왜요?
H: 그니까
F: 보기가 더러워서?
H: 뭐라고 그럴까? 굉장히 지독해. 말을 해도 아주 굉장히 독한 말을 하고 그러니까. 그니까 평양에 가서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는데
F: 아 드셨어요? 한 번 먹어 보고 싶어요. 옥류관.
H: 옥류관. 그게 양권이라고 있잖아? 식권. 양권 없이는 2원씩 했다고 2원. 그니까 2원이라면 굉장히 큰 돈인데, 냉면 한 그릇에 2원씩 했다고.
F: 어땠어요 맛이? 맛있었어요?
H: 괜찮았어 냉면은. 그러나 내가 차출할라고 그 양권을 구입을 한 거예요. 나는 여행할라믄 허가가 떨어져야 양권이 나오는데, 허가가 떨어지나 안 떨어지지 나는. 왜냐, 어데 평양 간다고 그러고 양권 걸라고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배급도 안 나오는데. 왜냐면 무단결근 하니까. 일 안 나가니까. 배급도 안 나오니까 양권도 못 타는 거야.
F: 어떻게 하셨어요?
H: 그래서 이제 돈을 주고 양권을 사는 거야.
F: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예요?
H: 그게 왜 그러냐면 여행 갔다가 양권이 남거든 그러면 그걸 사는 거야. 그것도 백미 양권. 백미 양권. 쌀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식당 가서. 식당에서 양권, 백미 양권을 주면은 쌀밥이 나오니까. 안 그라면은 그냥 양권은 잡곡, 그러니까 막 옥수수가 캬 이런 밥이지. 그러니까 백미 양권을 그 때 당시 내가 200g짜리 하나에 1원인가 주고 산 거야. 여행 갔다 오면은. 백미 양권은 누가 그거 하냐면은 간부들이니 누구니, 아니면 이제 배 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백미 양권을 줘.
F: 아 그렇구나.
H: 그러니까 그걸 사가지고 여행을 가는 거야. 그러니까 웬만한 데는 냉면 먹으러 가면은 그거 양권 안 내고 그냥 돈으로 사먹고.
F: 양권이 있을 때는 양권으로 먹고. 아 그렇구나.
H: 그리고 평양에 가면은 교포들이 많이 와 있어 역에.
F: 1차부터 4차 때 많이 일단은 들어갔다고 방금 하셨죠? 그 때 평양에
H: 근데 지방에서 평양 와가지고 있으면 어디 갈 데 없으니까 평양역에 와 있는 거야. 거기 거쳐서 이제 다 가니까. 가 보면 교포들이 엄청나게 많이 와 있지.
F: 뭐 누구 만났거나?
H: 만나가지고 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했고 그랬지.
F: 다 했어요? 뭔가 재밌는 기억 나는 얘기 있어요?
H: 그러니까 다 똑 같은 얘기야.
F: 뭐 그냥 다른 지역도 뭐
H: 도저히 속아서 와가지고 못 살겠다 이런 얘기. 그리고 재일교포는 표가 나요. 무슨 표가 나냐면은 옷이 다르니까.
F: 그렇죠. 옷도 그렇고 뭐라고 그러죠? 그 ふるまい? 그런 것도 있잖아요?
H: 응 그런 것도 있고
F: 사람들 대하는 모습이라던가 그런 것도 다 차이가 나죠?
H: 다 다르지. 교표는 보면 벌써 아니까. 머리 모양도 그렇고, 옷 입은 것도 다르고.
F: 그러면 좀 말 걸었어요?
H: 아니 가면 우가 앉아 있어. 뭐이가 앉아 있다고. 그러면 가서 이야기를 하고, 몇 차에 왔느냐, 뭐 뭐 물어 보잖아. 그러면 몇 차에 왔는데 어쩌고, 하 속았는데 이거,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 뭐 신의주에서 온 사람도 있고, 청진에서도 온 사람도 있고, 여러 군데에서 온 사람들이 다 평양에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평양 와 봤는데 별 볼일 없거든. 그러니까 그냥 저 뭐야 자기 살던 데로 간다고.
F: 지금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런 게 있었군요. 뭐 정보를 조금 좋은 정보라도 수집하고 그럴 수도, 3년 뒤에는 일본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던가 그런 얘기
H: 그러니까 그건 다 거짓말이라니까. 그래서 이제 니가타에서 저 적십자사가 이야기 하기를 3년 후에 일본에 오면 다 받아준다고 그랬거든 3년 후에. 3년 후에 뭐 오기가 힘든데 3년이 무슨. 10년 되도 못 가는데.
F: 결국 그러네요.
H: 그 한 동안에 일본에 저 뭐고 교포들이, 교포들이 등록증도 못 받았잖아요. 밀입국자로 돼 있었잖아요 한 동안에. 아니 이북에서 탈출해가지고 일본에 왔는데, 일본 정부에서 뭐라 그래 저 밀입자로 만들어 놓은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우리가 여기 한국에서 열 몇명이 가가지고 일본에 가가지고 일본 국회의원들 만나가지고 이야기를 한 거 아니오. 3년 후에 오면은 받아 준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밀입국자를 만들 수가 있느냐 하고 항의를 했거든. 그러니까 그 다음부턴 그게 국회에 통과가 돼가지고 교포들 전부다 전면 다 만들어 주었잖아요. 그게 다 그게 저 뭐이가 야마다 센세 그 사람하고 그 때 당시 우리가 동경, 동경에서 가고.
F: 그 때는 같이 계셨군요 그러면.
H: 그 때 내가 여기 한국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니까. 한국의 守り会 회장
F: 한국의 守る会
H: 그러니까 여기서 열두 명인가 데리고 일본에 간 거니까.
F: 그게 몇 년도였죠? 2000… 십년 이십 년 전이죠?
H: 그렇지 2001년도인가 2000몇 년
F: 그 때 즘이죠? 벌써 그렇게 되네요.
H: 2000몇 년도인 것 같애
F: 아 선생님 얘기가 좀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다가 선생님 여행도 다니시고 그러면서 어떻게 그럼 탈북 계획을, よし, 이 때 가자 이렇게 막 하고.
H: 아니 그래가지고 이제, 다시 이제 웅기에 가가지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해가지고, 팔 거 다 팔도, 돈이 한 2000원 가까이 됐어. 그 때 9월 달 즘 됐는데. 그것 가지고 이제 평양에 온 거야. 62년도 9월달.
F: 예 한 일년 3개월 뒤에. 다시 평양으로.
H: 와가지고 이제 돈 쓰고 다니면서 한참 있다가 탈출 계획, 이제 웅기 출발했으니까 이제 와가지고 어느 열차를 타고 어디까지 가겠다는 것을 다 계획, 계획을 다 세워서 놨으니까, 평양에서 이제 출발할라고 10월 달에. 그래가지고 평양에서 10월 달에 대동강역에서 열차 타고 남쪽으로 가는 열차가 있어요. 그거 타고 한 세포란 역이 있어. 거기에서 내려가지고 거기에서부턴 걷기 시작한 거야.
F: 근데 걸리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
H: 밤에만 걷고, 낮에는 숨어 있고. 낮에 다니면 다 보이잖아.
F: 그 계획은 어떻게 다 세우셨어요?
H: 그러니까 지도는 다 보고 이제, 뭐랄까 무조건 남쪽으로만 걷자 해가지고. 남쪽으로 향해서 걸은 거지. 그래가지고
F: 콤파스나 그런 거 준비하셨어요?
H: 아니
F: 그런 거 없이?
H: 없어
F: 어떻게 남쪽이라고 아셨어요 그럼? 하늘?
H: 동서남북으로 해가지고. 남.
F: 별 보고?
H: 그러다가 그냥 산에서, 절벽에서 떨어져가지고, 여기 지금 여 수술한 건데 팔, 여기 다쳐가지고. 그래가지고 살살 걸었어. 19일 날부터 걷기 시작해가지고, 여기 오니까 25일 날 낮 2시에 들어간 거지.
F: 생각보다 19일 날부터 25일, 그때 62년이시면 뭐 거기는 아직도 엄청 지뢰들이 많고
H: 그 때 지뢰가 많은데, 눈이 많이 왔거든. 낮에는 또 녹아가지고 얼잖아요. 그 다음에 거기에 또 눈이 오거든. 이래 되니까 걸리질 않았어요.
F: 눈에, 눈이면, 두껍게 나오면 그럴 수도 있는 건가
H: 아니 그러니까 눈이 오면 낮에는 따뜻하니까 위에 싹 녹잖아. 그 다음에 또 눈이 오면 눈이 또 쌓이잖아.
F: 아 그러니까 뭐… 그런 것도 알고 탈북하신 거 아니죠?
H: 아유 몰랐지
F: 지뢰가 있다거나 그런 것도 모르셨을 거 아니에요.
H: 아니 지뢰 있다는 건 아는데, 근데 하여튼간에 내가 저 38선까지는 몰랐어. 내가 38선이라는 걸 몰랐다고. 나중에 이제 그 철조망이 있었는데, 철조망이 너무 허름하게 해서 그걸 넘어왔거든, 넘어왔는데 보니까 그게 38선이야. 이북의. 38선.
F: 38선이 그 때는, 지금은, 62년도는 뭐 무부장지대?
H: 지금은 전기… 전기로 돼있잖아.
F: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니까 북도 남도 아닌 지역이 있잖아요. 거기를 들어가신 거예요? 아니면 그게 아직도 그렇게 넓지가 않아서 넘어가면 바로
H: 아니 아니 아니 그 때 당시만 해도 많이 허술했어. 지금은 뭐 말도 못 하지. 막 고압선, 고압선이 막 오고 가고 하니까
F: 네 거기서 탈북이라는 건 아마 시도조차 못 할걸요.
H: 그래가지고 그 양 가에 있잖아요. 여기에서 여기까지가 2키로 거든, 여기서 여기까지가 4키로. DMZ 안에, 그 안에 들어왔는데, 날이 새기 때문에 그 갈대밭에 숨어 있었던 거여.
F: 군인이 오거나 그럴 때도 있을 거 아니에요?
H: 없죠.
F: 아 없었어요. 뭐 그냥 보고 있는 사람은 있었을까, 저기 선생님께서 대략 이렇게 지도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지도가
H: 어디냐면은요. 평강. 평강지구라 하면 돼요 평강. 평강. 열차가 평강까지 가. 평강 전에 여기 또 세포라는 데가 있어 세포. 세포역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거야. 거기에서부터 걷기 시작했어. 거기서 이제 거마, 거마라는 데가 있어요. 거마쪽에로 넘어 온 거예요. 거기가 중부전선이니까.
F: 그리고서 쭉 내려오시다가 계속 걸으셨죠? 그리고 어떻게? 25일 날에
H: 갈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낮이 될 거 아니에요. 그 때 한 열두 시 됐는데, DMZ에서 북쪽으로 그 방송이 나가는 거예요. 거기에 음악이 막 나가고 막 인민군 장병 여러분 뭐 이러면서 방송이 나가는데 그 소리 딱 듣고서 깜짝 놀래 가지고 그 마이크 소리 나는 그 쪽으로 간 거야.
F: 아 그게 남조선, 한국에서 방송 나온 거?
H: 네 거기 가보니까 철조망이 이래 착 있는데, 그러니까 노란 간판에 까만 걸로 38선이라고 돼 있는 거야. 그거 보고 그냥 깜짝 놀랜 거예요. 나는 앞으로 한 이삼 일은 가야 38선이 오는 줄 알았는데, 그거 보니까 38선이야 이거 보니까 지뢰가 있나 없나 그거부터 알게 된 거야. 그래 이렇게 보니까 사람이 다니던 발자국이 있어. 그것 따라 이래 올라 가니까 GP가 있는 거야. 보니까 국군이 서가지고 있는 거야.
F: 어머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막
H: 아니 손을 들고, 말이 안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고, 그러니까 누구야 하길래 이래 했지. 철조망에 막 가려면은 가만히 있으라고, 여기 지뢰가 많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가지고 군인 하나가 이렇게 나와가지고 나 손 붙들어줘서 붙들고, 이 쪽에는 다친 팔이기 때문에 이렇게 있고, 잡고 이래가 보니까 까만 선이 이렇게 있는 거야 지뢰밭이. 그거를 거쳐서 거쳐서 GP에 들어간 거야.
F: 그 때 심정이?
H: 뭐 뭐랄까, 뭐 물어 보는데, 말이 이상하잖아요. 말이 좀 이상하니까 어디서 왔냐고 그러길래 함경북도 웅기에서 왔다 그러니까 에! 놀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재일교포인데 북송돼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왔다니까, 햐! 그러냐고. 그리고 막 밑에다 전화 걸어가지고, 거기에 소대장 말고 연대장인가? 지프차 타고 올라와가지고 와 반갑다고. 그래가지고 후방으로 이래 내려오는데, 그 38선에서 후방까지 오자면은 도중에 초소들이 많아요. 그러면 그 초소에서 그 초병들이 막 이상 없다는 소리를 지르거든. 그럼 깜짝깜짝 놀랬어. 그래가지고 어느정도 후방까지 와가지고 거기서 이제 식사를 하고,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봐,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 뭐랄까 의사가 와가지고, 이게 부러진 지 모르고 팔을 빼가지고 끼워 넣는다고 했는데
F: 아프시겠어요.
H: 아니 모르핀 넣고 했으니까 안 아프지. 근데 이게 부러져버린 거야. 부러져가지고 나중엔 저 서울에 와가지고 수술 받았지.
F: 아 예
H: 그래가 여기 와가지고 수술 받고, 한국에 와가지고, 환영식을, 2월 8일날 환영식하고, 그리고 얼마 안 돼가지고 사회에 나온 거지.
F: 금방?
H: 나는 일본에 다 조회를 하니까 아무 이상이 없거든. 아무 사상적으로 무엇인지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아무 그게 없어서, 딴 사람보다도 빨리 나온 거지. 이제 한국에 이제 삼촌이, 외삼촌이 계시고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살아계시고, 외할아버지도 살아계시고. 그게 이제 찾아와서.
F: 어떻게. 반가워해 주셨어요?
H: 그렇지
F: 그러면 다행이네요. 어머니께 연락은?
H: 어머니하고는 벌써 난 탈출하자마자 일본에 연락이 다 된 거야. 그래가지고 저 뭐야 환영식할 적에 이런 거 다 해가지고, 그 떄 대한늬우스라고 있어. 대한뉴스, 뉴스 방송에
F: 선생님 나오시고.
H: 응 방송이 그냥 일본이고 세계 각국에 다 나간 거야. 방송을 한 거예요. 재일교포가 북송돼가지고 38선으로 탈출해 왔다고.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내가 살아 돌아왔다고 하니까 난리가 난거지 뭐. 그래가지고 한 동안은 어머니가 밖에를 못 나갔어요. 저녁에만. 조총련들이, 조총련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F: 그러게요? 무섭네요. 그리고 선생님 그러면 북한 쪽에서도 선생님께서 이제 남한에 계시다는 것을 그 때 방송 나왔다면 이제 알 거 아니에요. 그죠?
H: 그렇지
F: 선생님도 신문이 되게 무서우셨겠어요?
H: 아니 항상 그거 해줬으니까. 신변보호 해줬으니까.
F: 어머님은 그러네요.
H: 어머니는 일본, 일본 정부에서 한동안에 보호 받았어요. 왜 그러냐면 한국 정부에서 이야기를 해가지고 부모님이 이래 있으니까 부모님 조총련에서 가만히 안 있을 거다. 그러니까 보호 좀 해달라고 해서. 어머니가 또 가만 안 있고, 막 다니면서 교포들한테 막 이야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내일 모레면 니가타 갈 사람들이 보따리를 풀어버린 거야 안 간다고. 그러니까 내가 오고 얼마 안 되가지고 북송 할라고 갈라 하던 사람들이 다 보따리를 풀어버렸으니까 조총련이 가만 있으려고 하겠어?
F: 62년 하… 그러면 선생님 정말 62년도에 선생님의 공훈으로 진짜 안 가게 된 사람들 꽤 많이 있겠네요.
H: 많이 있지. 그 다음에, 나중에 알아보면 알지만도 소련 배 두 개가 왔다 갔다 했는데 나중에는 만경봉호가, 사람이 없어지니까 만경봉호가. 바꼈잖아. 왔겠잖아. 그 내가 온 이후로 제일 많이 간 게
F: 61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제일 많이 간 게 60년 61년이니까
H: 61년도
F: 62년도에 확 줄어든 것은 선생님의 공훈이네요.
H: 그 때부터 그냥 싹 줄어들어버렸으니까 조총련에서 가만 있으려고 그래요? 어머니한테 막 화살이 붓는 거지. 반동 분자의 어머니라 해가지고.
F: 선생님은 그럼에도 일본 뉴스에 나오는 거를 그래도 선생님께서 원하셨다고?
H: 그렇지 원래
F: 그거를 가지고 탈북을 하신 것이니까
H: 그래가지고 일본을 가기로 했는데. 저 뭐꼬 일본 정부에서 비자를 안 내주는 거야. 왜? 조총련이 가만 있으려고 그래요? 내가 일본에 오면은, 실물이 오면은 조총련 애들이 누굴 쓰게 해서라도 제거하려고 그러지. 그건 내가 아니까. 내가 왜 나고야에 있을 적에 이걸 했으니까 알지. 돈만 주면은 야쿠자한테 시켜가지고 오면은 제거시키라고 하면은 딱 하거든.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서도 알고, 안 된다.
F: 가슴 아프지만 선생님의 목숨을 위한 거기도 하네요?
H: 아니 그런 것도 있는데, 그 때 당시에는 그걸 내가 몰랐어 비자를 안 내주는 걸, 무슨 이유로 안 내주는 것도 몰랐고. 한국 정부에서는 조금 기다려라 기다려라만 했지. 나는 그냥 화가 뻗쳐가지고.
F: 그렇겠죠. 빨리 가서 어머님 뵙고 싶은데.
H: 아니 어머니도 어머니인데, 교포들한테 싹 다 알리고 조총련 간부, 뭐 사무실이고 다 때려 뿔려고 막 그런 마음 먹고 있었는데 일본 가면. 안 보내주니까 그냥 미치겠는거야. 그래가지고 한국 와서도 사고 무지하게 사고쳤어. 사고 냈다고 한국 와서.
F: 아 그래요?
H: 갑자기 일본 없어지니까. 내가 없어지니까, 어디 갔냐고 지명 수배 내린 거예요. 나 없어졌다고.
F: 한국에서?
H: 네 한국에서 지명수배를 내렸다니까. 경찰서고 어디고 전국적으로 나를 거 하면은 데리고 가라고.
F: 왜 없어졌다고 그렇게 된 거죠?
H: 내가 도망간 줄 알고. 일본으로 그냥 도망가면 어떻게 해요? 일본 사서 난리칠 건데.
F: 선생님 어디 계셨어요 그 때?
H: 부산 가가지고 밀선 타고, 배타고 일본 갈라고.
F: 진짜 일본 가려고는 하셨구나.
H: 몇 번 시도를 했어요.
F: 어선 이런데 타면 데려다 줄 사람도 있겠고, 부산에서는 그런 것도 해주겠으니까 밀항선 타고.
H: 근데 막상 갈라고 딱 배를 탈라고 했는데 못 갔어요. 왜냐? 내가 일본을 가는 거는 좋은데 한국 정부라던가, 여기서 가면 일본에서 내가 만일 그냥 죽는다면은 이거는 모든 게 다 허사로 돌아가는. 그래서 그냥 나중에는 마지막으로 나중에는 포기를 한 거야. 남아서 어머니가 계시니까 하여튼간에 계속 어머니를 통해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래가지고 어쩔 수 없이 나중에는 이제 한국에서 결혼을 한 거예요. 그래 한국에서 결혼을 해가지고 어머니 동생 다 한국 왔잖아 결혼식 때. 저 앨범에 있어요. 그 뒤에 앨범 있잖아요. 고거. 빼보세요. 이리 줘보세요.
1:43:50 앨범 이야기
H: 2월 8일 날 한국의 환영식 할 적에. 1963년 2월 8일 날
F: 이거 제가 기록해도 될까요?
H: 네 괜찮아요.
F: 몇 살 때 결혼하셨어요?
H: 어 67년도
F: 그러면 탈북하시고 몇 년 뒤에 사람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결혼이나 그런 걸 생각하는 나이 대였기 때문에.
H: 여기
F: 가족 분들 다 오시고
H: 여기 어머니, 여기 동생
F: 아 그 때 태어난 남동생, 여기 아버님께서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결혼하실 때 아내 분이 이런 북에 갔다가 이렇게 내려왔다는 얘기도 할 거 아니에요 그죠?
H: 네
F: 그런 것 어떻게 잘 받아들였어요?
H: 알고 하지
F: 알고 하셨어요? 아내 분은 어디 사람이에요 한국에?
H: 저 남원, 전라북도 남원
F: 어떻게 만나셨어요?
H: 중신, 중신해가지고.
F: 애는 얼마나? 따님이 계시고
H: 딸 둘 아들 하나
다 이제 시집 가고, 장가. 아까 그 손녀 손자가 그 아들.
F: 그러면 선생님은 여기 지금 남한테 오셔서 탈북자 사람들의 모임 그런데도
H: 잘 안 모여요.
F: 잘 안 모여요? 그럼 귀국자 분들은요? 만나기도 해요?
H: 네 귀국자들 만나지
F: 선생님 그래도 뭐 선생님 말씀 나누다 보니까 61년도에 선생님은 정말 큰 그런 공헌을 하셨다 싶어요.
H: 근데 뭐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F: 그렇죠. 좀 더 많이 알리고, 아니면 총련에다가 殴り込み하시고 막, 젊으셨으니까 또 그때는 더 열정도 많으셨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거기서 아직도 60년도니까 굶지는 않았겠지만 고생을 하는 일본에서 온 사람들을 북에서 봤을 거고.
H: 그러니까 나는 그래도 초창기 제 1호니까 넘어온 거지 뭐. 나중에 95년도에 처음 재일교포가 북송됐다가 저 탈출해 중국으로 해서 온 사람이 있어. 그거 만난 게 처음 만난 거였어.
F: 만약에 선생님이 일본에 갈 수 있다면 어떻게 막고 싶었어요? 귀국 이런 사업을, 북송 사업을.
H: 어, 어쨌든 사람 만나가지고 모든걸 갖다가 전부 다 이야기 할라고 했지. 왜냐면 그때 당시만 해도 사실 조총련이라도 실질적인 조총련은 얼마 없었어요.
F: 실질적인 조총련이라는게
H: 그렇죠. 왜 그러냐면은 내가 처음에 이야기 하듯이 내가 조총련 된 것은 난 조선인이다하는 그것 때문에 조총련이 되었지, 실질적으로는 내가 원해서 조총련이 된 사람은 별로 없어.
F: 아 그냥 뭐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H: 자연적으로 조총련이 됐지. 저 내가 이북이 좋다 그래가지고 조총련이 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얘기야. 그래가 물론 오사카 사니까 알겠지만도 오사카에는 제주도 사람이라던가, 제주도하고 아니면 저 전라도 이쪽으로 다. 경상도 사람은 얼마 없어. 저오사카에는. 저 경상도 사람이 제일 많이 사는 데가 나고야 이 쪽이에요. 아이치켄. 뺄갱이가 제일 강한 데가 나고야야 나고야 아이치켄. 동경이 아니에요. 원래 원 빨갱이가 제대로 간 데가 나고야 이쪽이에요. 제일 세요.
F: 그러면 거기서 아버님은 뭐랄까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총련에 들어갔다고 하시지만
H: 아니요 아버지는 거기에 사상에 빠졌고.
F: 네 본부에서도 활동하셨다고 하시고. 사상에 빠진 거예요 아니면 사람?
H: 아니 사상. 공산주의 거기에 빠진 거지. 그러니까 고등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진 사람이 많다고. 이북에는 안 그런데, 일본에서는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이 거의 다 공산주의자가 많이 됐어.
F: 그렇죠. 안 그래도 아버님 주변에도 지식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계셨겠네요?
H: 그게 물들면은 물이 잘 안 빠져요. 확실하게 보기 전에는 안 빠진다고. 북송 한 거는, 일본에서, 이북에서 조작돼가지고 만든 거예요. 왜냐 대한민국 그 전쟁 625사변 나가지고 이북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거든. 일 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북 그 말이 있어요 나중에. 과부가 제일 많은 데가 북한이라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거야. 그래가지고 재일교포들
F: 가서 일도 주고 기술도 주고
H: 응 돈 있겠다, 또 일본에서 가면은 기부도 하고 가고 이러니까.
F: 아버님이 만약에 북으로 가셨다면 정말 완전히 기술자로 오셨겠네요.
H: 그렇지 않아. 왜냐면 일단 북에서는 안 알아 줘요. 나하고 같이 갔던 간부들도 왜 함경북도로 가요? 평양으로 보내주지. 안 그래? 그 추운데, 함경도로 가라 하면 엄청나게 추운 데예요 거기가. 더군다나 내가 있던 함경북도는 말도 못 해요. 소변 보면은 소변이 이렇게 얼어서 올라 온다니까. 화장실 가면은 대변을 보잖아. 그러면 이게 탑이 쌓여요. 얼어가지고. 그해서 거기 가면 이야기를 해 준다고 겨울에, 겨울에 화장실 갈 적에 조심하라고. 왜냐면 그냥 앉으면은 화장실에 히프 완전히 찢어진다고 그러는 거야. 그 얼음이 얼었으니까 푹 모르고 확 앉았다가는 다 찢어진다고. 가운데 다리를 이렇게 툭툭 쳐보라고, 안 걸리면 앉고 그러지 않으면 앉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화장실 푸는 것도 이렇게 못 퍼요. 꽁공 얼어서. 이런 지렛대를 가지고 찍어가지고 푼다고.
F: 많이 고생하셨겠다. 가장 북에서의 생활에서 돈이 있으셨다고 하니까 그래도 사 먹고 그랬을 수는 있겠지만
H: 그러니까 저 야메(闇)살있잖아요. 야메살을 사가지고 먹고 그랬으니까.
F: 가장 고생한 거라고 하면은, 그런 자유롭게 말 못하거나 그런 것들 답답하지 않으셨어요?
H: 아 답답하죠. 그러니까 결심 딱 결심하고 나면은 뭐 싹 그냥 내 마음에 가는 데를 한 바퀴 돌아보자 해가지고, 내가 신의주만 못 가봤어요. 신의주만 못 가보고, 내려오면서 전부 다 원산도 가보고.
F: 진짜 대단한 경험을 하셨네요 선생님.
H: 근데 내가 다 봐야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안 보고서 이야기를 못 한다는 거지.
F: 그게 탈북을 전부터 계속 계획을 해오셨지만 그래도 뭐랄까요? 목숨 걸고 가는 거잖아요.
H: 그냥 죽더라도
F: 죽기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게 우선이셨어요?
H: 목숨 안 걸고는 안 되니까. 나도 중국을 걸쳐서 탈출할라고 생각도 많이 해 봤어요. 근데 중국 가가지고 어딜 가냐고 이 얘기야. 전혀 모르잖아. 단 38선은 건너 갔다 하면 남, 한국이니까 그것만 잘 넘어가면 된다 하고. 근데 원래는 추우니까 저 여름에 갈 것이냐 가을에 갈 거냐 안 그러면 겨울에 갈 거냐 이래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근데 보니까 겨울이 밤이 길잖아요. 그래서 겨울로 택한 거야. 밤이 길어야 오래 걸어갈 수 있으니까.
F: 그랬더니 눈도 쌓여 있고 지뢰도 안 밟고 추웠겠지만.
H: 내가 있던 데 인민군에 가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은근히 술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야 그 38선 굉장히 무서운 데인데 이래 하니까, 그렇지도 않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요. 거기 가면 제일 그거 한 거는 겨울이 힘들다. 왜 힘드냐 물어보면, 추우니까 첫째 겨울에 보초 설라고 추우니까 보초 서기가 제일 힘들다고 그러는 거야. 대부분은 되게 추우면은 보초도 그냥 덮고서 이렇게 있지 뭐 서 있지 못 한대 추우니까. 그걸 다 듣고 난 뒤에 종합적으로 생각할 적에 겨울에 가는 게 탈출하기 좋다 이래 된 거야. 그리고 눈이 오면은 눈이 쌓이고 녹고 쌓이고 이래가지고 지뢰가 걸리지 않는 다는 얘기를 들었고
F: 아 들으셨어요?
H: 그럼. 그래서 그냥 그런 거죠.
F: 인민군 사람들이랑 그러면 북에 있을 때부터 조금 대화하고 그랬군요.
H: 그러니까 격장 안에서는 그 뭐고 대화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그러면 이제 내가 갈 적에는 그거 정보를 그거 할라면은 인민군대 갔다온 사람을 그거 해야 한다고, 아는 걸 미리. 저 재일교포들한테 물어본다고. 야 저 인민군대 갔다 온 친구가 누구누구냐 하고 물어보면 누구누구라고 그런다고. 그러면 전방에 38선에서 근무하고 온 애가 몇 명 있냐 물어보면 몇 명 있다 그래. 그러면 그 놈들하고 친한 척하면서 야 우리 같이 술 마시자 해서 술도 같이 먹고 뭐 이런 얘기 저런, 저 뭐야 근무할 적에 힘들었지 하고, 그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면 거기서 말이 나오는 거야.
F: 이야 선생님 계획이 있으셔.
H: 그래야 탈출을 할 적에 절대적으로
F: 이해가 잘 갑니다. 선생님. 그렇게 정말 계획적으로 시도를 하셨구나.
F: 만약에 아버님이 62년 이후에 공사 마무리하시고 H 선생님을 찾아 북송하시고서 오시면은 어땠을까요?
H: 탈출 못 했겠지. 근데 안 돌아가시더라도 그 공사 끝나려면 다음 해 몇 월까지니까 그 안에 탈출해야겠다고 그런 거지.
F: 최대한 빨리? 그리고 오지 말라고 하시고?
F: 탈북을 하시긴 잘 하신 거네요?
H: 그렇지
F: 잘 했다고 생각 하시는 거죠?
H: 그럼. 한 사람이라도 북송 안 됐다는 게 나는.
F: 근데 안타까우시겠어요. 지금 아직도 북에 남아 계시는 귀국자 생각하시면.
H: 그렇지. 이제 귀국자는 거의 사망했다고 봐야지. 아니 뭐 3세나 4세나 몰라도.
F: 그래도 그 때 북송했을 때 정말 어렸을 때, 한 열 살이라던가 다섯 살이라던가, 그런 어린이였던 분들이 지금 이제 60세 70세
H: 지금 60대 70대 다 돼 가지.
F: 그럼 진짜 오래 살면 그나마 계시겠지만
H: 힘들어요. 이북의 수명이 70까지 사는 게 힘들어요. 왜냐면 영양실조 이런 거 하니까. 만약 일본의 부모들이 돈이나 많고 이런 사람들은 돈을 보내주니까 생활하기는 쉬우니까 오래 살 수 있지라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힘들어요. 첫째 영양, 영양실조에 많이 죽는 사람 많아요.
F: 선생님 입장에서는 선생님이 이북에 만약에 계시는 친구나 그런 분도 계시지 않을까요? 그죠?친구도 계시죠?
H: 있지.
F: 근데 여기 남한에 있으면 편지도 그런 것도 못 하고 그러시겠네요.
H: 뭐 그 친구들 다 죽었지 뭐. 웅기에서 만난 친구들은 다 죽었다고 봐야죠.
F: 그 분들 생각하니까 저도 좀 가슴이 아프네요. 만약에 시간을 돌려서 한 번 더 인생을 걸을 수 있다면, 일본을 그래도 열심히 가려고 할까요? 아니면 여기 그래도 계시길 잘했다고 하실까요?
H: 글쎄 그건…
F: 어려운 질문이긴 해요. 그 때 만약에 선생님께서 일본에 가셨다면 뭐 목숨에 그런 있었을 수도 있고.
H: 근데 내가 바로 일본으로 갔다면은 아마 조총련들이 많이 당했을 거야 나한테 당했을 거라고. 왜냐 성격이 워낙 급한 성격이라서 너희들 때문에 교포들이 얼마나 가서 고생을 하고 그걸 알기 때문에, 조총련이라는 건 없어져야 된다고 항상 이야기할 거란 말이야.
F: 그 할 말을 못 했던 것은 좀 아쉽네요.
H: 그니까, 그 동안에 이제 방송이니 이런 거 다 했기 때문에 그거는 전달됐지만도 먼저 2000년대에 그 때 일본가가지고 방송할 적에, NHK 방송할 적에 쭉 했기 때문에 그냥, 그 방송이 한 일주일 이상 방송이 쭉 나오더라고. 그 다음에 또 조총련 상대로 재판했잖아요? 재판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 알아요. 내가 일본 재판할 적에 한국에서 일본 가면은 입국 관리청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다 알아.
F: 워낙 유명하셔서.
H: 힘내라고 나보고 힘내라고.
F: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의 무거운 인생을 들고 인생을 걸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이렇게 선생님께서 열심히 달려 오셨고 탈북하셨을 때 크게 뉴스도 방송이 됐었고, 아마 세계적으로도 나왔을 텐데 왜 그래도 북송이 계속 이어가고 왜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했을까라는 고민이 또 생기네요.
H: 그거는 왜냐하면 북에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어요. 부모가 또 이북에 있는 경우에 있잖아. 그렇다 보니까 만일로 그거 하면은 부모한테 뭐 한다던가, 자식을 가만히 안 둔다든가 이런 협박을 하잖아 조총련들이. 그래서 보따리 싸고 가는 거지 자기 마음으로 가는 사람이 없을 거구로. 그러니까 만경봉호에 열 명이고 열 몇명 타고 가는 게 고작이잖아요. 우리 갈 적에는 천 명이에요 천 명. 그리고 일본에서 북송된 사람들이 못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오히려 웬만침 사는 사람들이 북송했다고. 왜냐면은 차라리 살기 힘들었으면은 북송 안 한다고. 이북 안 간다고. 그 가도 고생할 텐데 같은 그거면 일본에서 하지 왜 가느냐 이럴 것 같아. 근데 북송한 사람들이 거의 보면 일본에서 웬만침 사는 사람들이에요.
F: 일본에서는 그래도 차별 받고 그런 건 있었겠지만, 사업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굶는 사람은 없었을 거고 안 그래도.
H: 그럼 일본에서야 굶는 게 뭐야. 안 먹어서 탈이지.
F: 예. 그리고 너무 가난하거나 그랬으면은 총련과 그렇게 활동 안 할 것 같기도 해요.
H: 그럼
F: 왜냐면은 기금을 못 하니까 그쵸? 선생님. 정말 많은 말씀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듣는 얘기가 아닌 것 같고요. 추후에 또 제가 선생님의 지금 녹음한 거 다시 한 번 듣고, 또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생길 수도 있는데 그 때 또 연락 드려도 될까요?
H: 네 그래요.
근데 젊은 사람들이 한국에 왔다 갔다 해야지요. 그 조총련 애들이 젊은 애들이 한국에 오는 걸 꺼려해서 그렇지. 지금 한국 오면 다 받아 주거든. 여행을 왔다 갔다 해야 알아요. 안 그러니까 모른다고. 민단 사람들이야 뭐 한국에 왔다 갔다 하지만도 조총련계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거든. 한국에서는 다 받아 주는데. 일본에 있는 조총련계가 어떻게 가할까 싶어서, 그게 두려워서 한국에 못 온다고.
F: 그렇죠. 왔다 갔다는 해야하고 또 많은 걸 봐야 되는데 되게 좁은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아서.
H: 근데 한국 정부에서는 조총련도 오라고 해요. 비자 다 내주잖아.
F: 네 요즘엔 그러더라고요.
H: 이제가 아니라 그 때 70년도에 그 때 한국 저 뭐야 모국 방문 시작되고 난 뒤에는 한국 오게 다 됐잖아.
F: 네 그러네요.
H: 그러니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조총련들이 거짓말 한다는 걸 다 알았잖아. 한국 오면 불도 없고, 거지가 득실거리고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는데 실제 한국 와보니까.
F: 완전 선진국 될려고 하, 됐구나 이젠 OECD도 벌써 이 때는. 네 선생님 한국은 그러면 가족들도 계시고 살만 하나요? 아내 분은 그러면 지금은?
H: 아 사망했어요.
F: 아 돌아가셨어요? 언제 돌아가셨어요?
H: 음 한 5년 됐어요.
F: 아 그러셨구나. 선생님께서 만약에 계속 일본에 계시거나 탈북을 안 하셔서 북에 계시거나 하면 이렇게 가족들이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거고
H: 그렇지
F: 되게 역사적인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 역사적인 일이 없었으면은 지금 손자들이 여기서, 남한에서 살지는 않았을 거고. 그런 거 생각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Interviewer: Rina Hong
Interviewee: Kim Haeng Il
Transcript Notes
Chongryon is the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one of two Zainichi Korean organizations in the country, with ties to North Korea.
Mindan is the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the other Zainichi Korean organization in the country, with ties to South Korea.
(帰順者/帰順烈士)A national merit award that is given to those who were abducted to North Korea and went through hardship and managed to escape. In those days, those who fled from North Korea were referred to as “gwisunja”.
How does the diversity of political opinions and alignments within Haeng Il's family challenge the traditional ideas of ideological bipolarity in Cold War historiography? Consider its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Cold War in Korea and Asia more broadly.
What does Haeng Il's experience of repression by the Japanese state through the school closures suggest about Japan’s Cold War?
In light of Haeng Il's experience in North Korea, consider the extent to which the Cold War (in Asia and beyond) was a clash of visions and images that civilian communities were being shown, rather than a clash of ideology?
To what extent is Haeng Il's activism to deter North Korean returnees a part of the Cold War?